전시    에피소드
에피소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이재호가 즐겨부르던 그 노래

“신입생이던 1986년 초, 수배중이던 이재호 선배가 신입생환영회 자리에 모습을 나타냈어요. 후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테이블을 연결하여 무대를 만들었고 이재호 선배는 그 위에 올라 남진의 '님과 함께'를 익숙한 듯 불렀죠. 알고보니 '님과 함께'는 이재호 선배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어요. 후배들은 노래에 맞춰 박자와 추임을 넣어주었죠”

 

그 날 아침, 세진과 나눈 마지막 대화

이튿날 아침 7시께 이정승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어젯밤 “먼저 (감옥에) 들어가 잘 정리해놓고 있을 테니, 열심히 잘 싸우고 한 놈씩 들어오라”며 호기롭게 웃던 김세진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준비 좀 할 게 있어서.”
“뭘?”
“어, 시너 좀 사려고.”
“그건 뭐하게?”
“짭새들 겁 좀 주려고.”

서글한 얼굴의 김세진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긴장할 때마다 보이는 특유의 버릇대로 손으로 앞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종철아, 앞으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86년 4월말 철이(박종철)는 한 수감자를 통해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그날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아들이 김세진을 만난 것은 85년 5월 관악경찰서에서 구류를 살 때였다. 두 학생은 유치장에서 통성명한 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숨죽인 채 대화를 나누었다. 아들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86년 봄이었다. 신림동의 어느 서점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때 김세진이 망설이듯 말했다

“종철아, 앞으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대 학생회장에 선출된 김세진의 당선소감이 대자보로 붙었다. 철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학생회장이 되면 바빠진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4월28일, 김세진은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85학번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학교 대자보에서 친구 이재호의 분신 소식을 듣다

“저는 미처 그런 시위가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른 채, 289-2번 버스를 타고 아침 9시 경에 정문 앞에 내렸어요. 내려서 법대 앞으로 해서 사회대학으로 올라가려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데, 법대 도서관 건너 편에 대자보 붙이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평소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아침 등교 시간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기 많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대자보 앞에 학생들이 뭐 엄청나게 많이 몰려서 뭔가를 읽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뭔 일이 있나 하고 가서 학생들 머리 너머로 멀리 보니까, 하얀 전지에 매직 펜으로 대자보가 쓰여져 있는데, “이재호 김세진 분신사망” .. ‘아닐 지도 모르는데’ 이런 생각도 한편에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대자보의 글씨 자체가 그대로 사실의 무게로 저한테 느껴졌고, 어.. 또 거기에 이미 “분신”했을 뿐만 아니라 “사망” 이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아침에 그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사건이 터져서 재호가 죽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한참을 눈물을 흘리다가, 사회대학으로 올라가서, 다시 시간이 한참 한두 시간 흐른 후에, 같은 과 후배인 주재술이가 신림동 사거리에서 재호와 세진이가 분신한 자리에서 주워온 거라고 하면서 새까맣게 탄 만년필하고 안경을 주워왔어요. 근데 안경이건 만년필이건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그야말로 뒤틀려서 새까맣게 탄 상태였고, 친구들과 이제 그걸 보면서.. 기가 막혔죠”

 

엄마, 어디가 편찮으세요?

김현채 은사님이 오셔서 엄마 살을 떼어 재호 몸에 붙이면 될른지 모른다고 말했다.
19일, 살을 떼서 재호한테 붙였다. 엄마가 병원 가운을 입고 있으니까 "엄마, 어디가 편찮으세요?"하고 묻는다.
엄마는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재호는 눈치가 빨라 알아차리고는 슬퍼한다.
"재욱아, 종이와 펜을 가져와"
재호는 엄마한테 편지를 쓴다고 한다.
엄마는 "재호야 얼릉 나서서 집에 가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20일이 되는 날 재호 소변이 안나오더니 22일에 다시 나왔다.
"엄마, 노래를 부르세요"
"재호야 너 먼저 불러라"
재호는 노래를 부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