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사건의 여파
사건의 여파
김세진 이재호 분신사건은 반미운동은 물론 한국사회 민주화운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 몇 가지를 소개한다
'말' 특집호 ‘보도지침’ 폭로사건

87년 6월3일 재판에서 모두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로 풀려나자 민언협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 고 조영래 변호사, 최민희 간사, 임재경, 시인 고은 선생 등이다

'말' 특집호 ‘보도지침’ 폭로사건

19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는 <말> 특집호로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발간했다. 전두환 정권의 문화공보부가 신문과 방송에 매일매일 전화로 지령한 10개월간의 보도지침(1985년 10월~86년 8월), 즉 비밀통신문을 요약·정리해 폭로했다. 이 ‘비밀지령문’의 원자료는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당시 편집부)가 편집국에서 철해서 보관중인 ‘비밀지령문’을 복사해 민언협에 제공한 것이었다.
“신문 제목에 ‘호헌’이나 ‘개헌’이라는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말 것”
“신민당 광주 개헌 집회에서 시위 군중들이 ‘축직할시 승격’ 아치를 불태우는 장면 사진을 꼭 실을 것”
“‘전국 대학 학생회 사무실을 수색했더니 화염병과 총기 등이 나왔다’는 것을 꼭 제목으로 뽑을 것”
전방 입소 거부 서울대생 데모 때 분신 사망한 김세진·이재호 사건 보도에는 ‘신성한 병역의무인 입소를 거부하려 한다’고 기사 도입부에 꼭 넣을 것”
“5·3
인천사태 보도에는 ‘학생 근로자들 시위’로 쓰지 말고 ‘자민투, 민민투, 민통련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고 할 것”
“과격한 인천시위는 신민당이 유발했다고 다룰 것” 등등

 

백종수 분신기도 사건

노동자 백종수는 학교교육에 대한 회의 때문에 한양공고를 중퇴하고 나서 방위 근무를 마친 후, 막노동을 비롯한 노동을 해왔으며 평소 노동문제에 관한 독서를 해왔었다고 한다. 그는 85년 8~9월경에는 자신이 손수 제작한 유인물을 거주지인 수색동 일대에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평소의 사회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백종수(26세, 서울 은평구 수색동 145번지 4통10반)는 86년 9월3일 저녁 6시 15분경 세종문화회관 앞 차도에서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한 채, “광주사태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전신 80%의 3도 화상으로 중태인 상태였다. 백종수는 4일 오전 병원으로 찾아간 박영진 열사의 부친 박창호 선생을 알아보며, “군사독재가 없어지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창호 선생은 “네가 생각한 그 뜻을 너의 부친과 함께 노력해서 이루겠다”며 그를 위로했다. 백종수는 또 이어 방문한 계훈제 선생 등에게 “내 죽음은 아무도 간섭 못한다. 광주사태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민족의 쓰레기는 없어져야 한다. 노동 3권 보장하라.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라고 자신의 분신 동기를 밝혔다.
백종수는 파라솔 생산업체인 대알타포린에서 근무해왔는데, 이 회사에서 임금을 2개월 체불하자 노동자측 대표로 뽑혀 8월24일부터 사흘간 농성을 주도하여 8월27일 밀린 임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백종수는 또 한 친구에게 “김세진 이재호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그 친구가 “살아서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자, 백종수는 “신문기자들이 김세진 이재호의 죽음의 의미를 함부로 말하고 있다”며 분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