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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해제 서울역 대학생 가두시위 및 해산 사건

제목(Title) : 비상계엄해제 서울역 대학생 가두시위 및 해산 사건 : 서울역회군 사건, 5.15회군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00515


사건내용 : 1980.5.1 : 서울대 긴급조치위반복교생 3백여명, 낮 12시 30분 도서관 앞 광장에서 재학생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비상계엄 즉각 해제, 2원집정부제 구상철회 등을 결의, 대회후 1천5백여명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까지 행진, 기동경찰과 30분간 대치(황의봉, ??80년대의 학생운동', 예조각, 1985, p274; 동아일보 1980.5.1)
1980.5.2 : 서울대생 1만여명 정오경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화대총회 개최, 계엄해제 등을 요구. 철야농성하면서 ‘시국성토를 위한 서울대인의 밤’ 행사 진행. 서울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병영집체훈련 응하기로 결정(동아일보 1980.5.2, 5.3) / 고려대생 1천여명 오후 8시 반경 서관뒤편 농구장에서 계엄철폐 정부개헌주도반대 유신잔당퇴진 정치일정단축 보장 등 구호를 내걸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뒤 스크럼을 짜고 교문앞까지 진출, 경찰과 충돌. 석탑축전포기하고 5일까지 ‘민주화1차대행진’을 벌임 / 성균관대 1천8백여명 정오부터 계엄해제, 징병검사통지서철폐 등을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투석전 전개(황의봉, pp.274-275; 동아일보 1980.5.2)
1980.5.3 : 서울대, 비상계엄해제 등 요구시위
1980.5.4 : 서울대 1년생 문무대 입소, 제3차 민주화대총회(동아일보 1980.5.5)
1980.5.6 : 숭전대생 7백여명,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채택. 외국어대생 2천여명, 민주화촉진대회. 이화여대 총학생회, 5월 한 달을 ‘이화민주투쟁의 달’로 결정. 연세대 총학생회, 비상계엄해제 요구하는 비상학생총회 개최(동아일보 1980.5.6). 동국대생 7백여명, ‘민주화를 위한 학원대회 개최’. 한신대, 시국선언문 발표 및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농성돌입(동아일보 1980.5.7). 학원민주화 등 요구하며 대학연합 가두시위
1980.5.7 : 연세대, 시국성토대회. 한신대 대학원생,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선언]발표. 연세대 대학원생, [민주화운동에 즈음한 우리의 결의]발표. 홍익대 1천여명 ‘범민주화 촉진대회’ 개최(동아일보 1980.5.7). 외국어대생 8백여명 야간 가두시위(동아일보 1980.5.8)
1980.5.8 : 중앙대 총학생회, [5.8선언문]발표. 이화여대, 국민대, 숙명여대, 홍익대, 동국대, 인하대 등 비상계엄해제, 노동3권 등을 요구하며 교내시위(동아일보 1980.5.8, 5.9). 서울지역 대학신문들, [시국에 대한 대학신문 결의]채택.
1980.5.9 : 연세대, [연세대학교 민주화투쟁선언문] 발표. 서울대 학부?대학원생, 계엄해제요구 철야농성. 이화여대, 연좌시위. 숙명여대?한양대, 횃불시위. 건국대?인하대 시국성토대회
1980.5.10 :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비상계엄해제, 노동3권보장 등 10개항의 결의문 채택(동아일보 1980.5.10). 단국대 시국성토대회
1980.5.13 : 서울지역 대학생 계엄철폐 가두 시위(동아일보 1980.5.14)
1980.5.14 :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 결의(동아일보 1980.5.14)
1980.5.15 : 전국 대학생 계엄해제 요구 가두시위, 35개대 7만여명 서울역 집결 및 해산
1980.5.16 : 서울대 등 27개 대학총학생회장단 ‘일단 교내 및 가두시위 중단, 정상수업’ 결의(동아일보 19805.16).
1980.5.17 :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연행

<사건배경>
10.26사태 이후 학생운동진영의 민주화 요구는 학내민주화와 더불어 5월부터 비상계엄해제로 상징되는 정치민주화 요구로 본격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이러한 학생운동진영의 민주화투쟁은 복학생 일부그룹(국민운동파)의 전면적 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5월 13일 이후 학생들의 전면적인 가두시위로 나타났다. 여기서 ‘복학생그룹’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내에서 행동주의노선을 주창하던 부분을 지칭한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사상이론과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형성사, 1988, p44). 5월 14일에는 서울시내 21개대 대학생과 지방의 11개대 대학생 15만명 정도가 가두시위에 나서 자정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전국의 60여개 대학생 수십만명이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서울의 경우 주집결지인 서울역에는 10만명(동아일보 집계 7만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동시에 집결해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의 선두그룹은 광화문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편은 남대문방향으로, 또 한편은 서대문을 돌아 신문로 쪽으로 진출하다가 남대문과 고려병원입구의 두 선에서 4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한편 이날 학생운동 지도그룹들은 투쟁방침을 놓고 토론을 전개했는데, 일단 시위와 농성을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입장(회군파)과 학생대중의 농성을 해산해서는 안되며 군부대가 있는 용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군부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반회군파)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회군파의 논리는 단계적 투쟁론의 입장에 서있던 ‘학생운동지도세력’-‘서울역 회군’을 주도한 ‘학생운동지도세력’은 ‘재학생지도부’를 말하는데, 이들은 1970년대 유신독재하에서 소그룹형태로 자체역량을 보존?준비해오던 학내 운동역량들이 1979년 10.26사태 이후 조성된 유리한 형세속에서 학내 학생대중활동의 수행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낮은 수준의 공동논의구조?실천구조를 마련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강신철 외, p44).-에 의해, 반회군파의 논리는 전면적 투쟁론 입장에 있던 ‘국민운동파’에 의해 주장되었다. 회군파의 ‘학생운동지도세력’은 학생들의 광화문 진출시도를 제지하고자 했으며, 농성장소를 여의도로 옮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학생운동지도세력’은 내무부 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안전귀가를 보장받는 대신 학교로 퇴각할 것을 결정했다(편집부 편, ??학생운동논쟁사1', 일송정, 1990, pp.26-27).

<사건내용>
4월 30일, 1979년 12월 이후 4개월만에 열렸던 긴급 계엄사전군지휘관회의를 통해 계엄사는 당시 학생운동을 “학원을 일 개인의 정치선전장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엄단할 것으로 결의했다(동아일보 1980.5.2). 하지만 학생들의 민주화요구가 5월을 지나 가두시위로 전면화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계엄확대조치’를 내리고, 광주항쟁무력진압과 학생운동활동가를 비롯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체포 및 수배조치를 통해 권력찬탈을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사전번호 : H-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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