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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시위진압 및 김귀정(성균관대생) 압사사건

제목(Title) : 폭력적 시위진압 및 김귀정(성균관대생) 압사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910525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66년 서울 출생
1985년 무학여자고등학교 졸업
1988년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입학
심산연구회 가입 활동
1989년 심산연구회 회장 역임
동아리 연합회 총무부장 역임
1991년 5월 25일 제4차 국민대회에 참가하였다가
대한극장 부근에서 경찰의 폭력적 강제진압에 의해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삶과 죽음> (http://ugh.or.kr/hacksang/hacksang1.html#김귀정)
김귀정 동지는 노점상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가족의 현실 속에서 악착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학 입학 후 [심산연구회] 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중을 고민하는 책임있는 운동가로 삶을 실천하던 중 아버님을 여의게 됐다. 그렇지만 "운동은 이름만 변하면 그 삶까지 단숨에 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끝까지 변하지 않는 신념"이라며 후배 및 동료들의 생활에 건강함을 불어넣었다. 항상 동지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미제와 파쇼에 대한 적개심이 부족한 점을 경계하면서 투쟁하던 중 1991년 5월 25일 제 4차 국민대회에서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에 포위되어 질식할 듯한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력에 의해 운명하였다. 그러나 강제 부검 결과 사인을 밝히지 못한 채 6월 12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사건내용>
5월 25일 오후 5시 30분쯤 서울 중구 퇴계로4가 대한극장 맞은편 진양상가 부근 차도에서 시위를 하던 성균관대생 김귀정양(25 불문과 2부 3년)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같이 시위하던 학생 20여명과 함께 넘어져 실신,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 김양은 시위 중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달려오자 부근 진양상가 옆 골목길로 피하려다 골목길에 주차해 있던 승용차에 걸려 넘어졌다. 김양의 시체를 검안한 응급실 당직의사 서병도(29)씨는 왼쪽 광대뼈와 왼쪽 무릎에 멍든 상처와 가슴 위쪽에 넘어질 때 생긴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어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해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양의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 500여명이 병원으로 몰려 와 응급실 철제 의자 등으로 현관문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의 출입에 대비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26일 새벽 1시 명동성당 교육관 1층에서 김귀정양 사망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시위진압 현장 책임자와 시경국장, 치안본부장, 내무부장관을 구속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대책회의는 또 성균관대 민주동문회와 함께 ‘고 김귀정열사 폭력사대책위’를 구성하고 26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노정권 폭력살인 공권력 만행 규탄대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91.5.26)
성균관대생 김귀정양의 시체 부검을 둘러싸고 대립해온 검찰과 김양 대책위가 6일 우여곡절 끝에 7일 중 부검을 실시키로 합의했다. 김양 대책위는 6일 밤 백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양 가족의 동의에 따라 부검에 응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대책위 측은 이 날 오후까지 김양의 부검을 거부해 왔으나 검찰과 경찰이 7일 중 백병원에 경찰력을 투입, 강제부검을 실시키로 한 가운데 성균관대 장을병 총장 등이 설득에 나서자 입장을 바꿨다. (조선일보 1991.6.7)
성균관대생 김귀정양의 장례식이 사망 18만인 12일 경찰과 별다른 충돌없이 치러졌다. 김양의 시신은 13일 새벽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조선일보 1991.6.13)


사건사전번호 : H-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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