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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제목(Title)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Subject :


결성일 : 1985-03-29


해산일 : 1989-01-19


단체성격 : 공개 / 반합법


주요활동지역 : 전국


주요인물 : 문익환(文益煥, 의장), 계훈제?김승훈(桂勳梯?金勝勳, 부의장), 함석헌?김재준?지학순(咸錫憲?金在俊?池學淳, 고문), 고영근?유운필?이소선?함세웅(咸世雄)?문정현?유강하?신현봉?이돈명(李敦明)?송건호(宋建鎬)?김병걸?김지하(金芝河, 지도위원), 강희남(중앙위원회 의장), 김승균(민주통일위원장), 이창복(사무처장), 호인수?박진관?정동익(감사), 이부영(민생위원장), 임채정(상임위원장), 이해찬(정책실 차장), 박계동(朴啓東, 홍보국장, 조직국장)


결성과정 : 1983년 9월, 선진적 청년활동가들이 이른바 유화국면이라는 탄압의 부분적 이완을 뚫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면서 사회운동에서도 공개적으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는 운동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후 1984년 들어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등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재야정치인들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도 결성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공개운동단체들이 형성되면서 1984년 6월, 공개적인 단체들을 중심으로 노동, 농민, 청년, 문화, 종교 등 부문운동의 통합틀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이 결성된다. 이와 함께 재야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포괄하는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10월에 구성되고, 이후 양 단체는 새로운 통합논의에 들어간다. <민민협>은 조직단위 가입을 원칙으로 하여 노동자, 농민, 언론인, 문화인, 청년, 종교인 등 부문운동의 대표자로 구성된 연대기구로 출범하였다.
한편 <민민협>에 포함되지 못한(->참가하지 않은: 연구팀) 명망성있는 재야민주인사들의 경우, 1984년 9월, “매국방일저지투쟁”을 계기로 10월 16일, <국민회의>를 결성한다. 이렇게 두 개의 운동체는 조직구성에 있어서 상이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민민협은 조직 혹은 단체가 중심이고, <국민회의>는 명망성있는 개인이 중심적인 구성원을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운동의 대표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양자가 경쟁적 관계에 있었고, 이는 아직 부문운동이 분화발전하지 못한 지역운동의 경우, 운동력의 중복현상을 가져왔으며 전국적 통합성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두 개의 운동체는 각각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민민협>은 조직과 단체에 기반하여 실세를 이루었던 측면이 있었으나 내적 통합력이 약하여 <민민협>차원의 사업이 힘을 갖지 못하고 국민적 명망성의 미흡으로 대중적 영향력이 떨어졌다. 반면 <국민회의>의 경우, 나름의 단일한 통합성과 국민적 명망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실제적인 투쟁력이 부재했다.
따라서 양 운동체의 내부에서는 1984년 말, 1985년 초에 이르면서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통합논의 과정에서 나왔던 쟁점은 ①연대운동의 수준을 협의체로 할 것인지, 연합체로 할 것인지 ②운동발전의 성과를 부문운동강화에 둘 것인지, 아니면 연대운동조직체에 둘 것인지 ③지역운동의 설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④지도력은 집단지도체제로 해야 하는지, 단일지도력의 강화로 해야하는지 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쟁점들이 충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당면한 필요성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이에 의해 <민청련>을 비롯한 개신교운동체들이 통합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당면한 통합의 필요성이란 2.12총선을 통해 신민당이 부상하면서 재야민주세력에서도 강력한 통합체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결국 민청련과 개신교단체들이 빠진 가운데 1985년 2월 26일 <민민협> 중앙위 결의와 2월 27일 <국민회의> 확대집행위의 결의를 바탕으로 3월 29일 통합대회가 개최되었다(민족민주운동연구소, 민통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평가서(Ⅰ)-자료편, 민족민주운동연구소, 1989, p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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