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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남측본부

제목(Title) :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남측본부 : 범청학련 남측본부


Subject :


결성일 : 1992-08-15


해산일 : 현재


단체성격 : 공개 / 비합법


주요인물 : 윤기진(의장), 정재욱 한총련 의장(상임부의장), 황선 대변인(부의장),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부의장), 서총련의장(부의장), 경인총련의장(부의장), 충청총련의장(부의장), 남총련의장(부의장), 대경총련의장(부의장), 부경총련의장(부의장), 청년대표(부의장), 해외본부(부의장)(범청학련 홈페이지 : http://bchy.jinbo.net)


조직체계 : 남측본부 중앙위원회 25명(의장단, 사무부국장, 의장단에서 추천한 중앙위원)
남측본부 의장단회의 11명
남측본부 중앙집행위원회(의장, 상임부의장,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 총회의 남측본부는 한총련 중앙위원(각대학 총학생회장)이 총회 구성원임


결성과정 : 1991년 8·15 청년학생통일대축전은 범청학련의 결성을 합의하게 된 주요한 계기였다. 이미 남북해외 청년학생 차원의 연대조직을 결성하는 문제가 대두되기는 했었지만 8·15통일대축전을 통해 확인된 청년학생의 통일열기는 연대조직의 결성의 필요성과 자신감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평양에서 진행된 1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 총화회의를 통해 남녘의 전대협과 북녘의 조선학생위원회 그리고 해외동포 청년학생들은 1년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뒤,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애초에 전대협은 조국통일범민족학생연합, 즉 범학련의 결성을 제안하였으나 해외측 대표단은 해외의 경우 재일본조선대학교를 제외하고는 민족대학이 없으며 주요 역량이 청년단체들에 있는 점을 들어 조직명칭에 청년을 추가할 것을 제기하였고 이에 따라 조국통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으로 명칭이 수정되었다)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3자는 결성준비 사업을 위해 베를린에 연락본부를 건설하기로 하였고 전대협은 이 연락본부에 박성희 성용승 두 대표를 파견하였다. 1991년 12월 베를린에는 남 북 해외 청년학생들의 최초의 공동기지, '범청학련 결성을 위한 남, 북, 해외 공동연락본부(이하 공동연락본부)'가 건설되었다. 공동연락본부는 범청학련의 결성 이전부터 남북해외의 3자의 상시적인 회담의 장으로서, 연결의 매개고리로서 남쪽의 파견대표가 직접 상주 운영하였다. 이는 그 어떤 정형도 없던 3자연대운동을 균형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이 범청학련을 결성하기로 합의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었다. "남과 북 해외에서 벌어지는 통일투쟁을 하나로 집결하며, 3자연대 연합을 실현하고 통일적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구심체가 있어야 한다.(1991년 8·15청년학생 통일대축전 총화보고문 중에서)"는 말처럼 그간 반국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통일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해외가 연대운동을 안정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해외가 연대운동을 안정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전민족적 통일운동체의 건설이 요구되어지는 시점에서 당시까지 조직적으로 완결되지 못했던 범민련을 지원 강화해야 한다는 것과, 각 계급계층별 연대조직의 건설을 추동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작용하였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이남학생운동 자체의 요구성에 기인하다. 88년 이후 이남의 청년학생 통일운동은 점차 대중적인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으며, 조국통일의 구체적인 경로까지도 모색되어지고 있었다. 이 속에서 이남의 청년학생 통일운동은 남북해외 청년학생들과의 본격적인 연대를 통해 분단 2세대간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민족대단결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는 전망을 내오게 된다. 그 당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편지교환투쟁의 경우만을 보더라도 공동연대의 틀을 형성하는 문제는 매우 절실한 과제였다.
1992년 3월 25일 전대협은 92년 8·15에 범청학련을 결성할 것을 목표로 남북해외에서 4월 중순에 공히 범청학련 건설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자는 것을 제의했으며 이에 따라 4월 12일 범청학련 건설을 위한 남측준비위원회, 북측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해외의 경우 "범청학련건설을 위한 재일 동포 청년학생준비위원회"(후에 범청학련 건설을 위한 해외준비위원회로 확대됨)가 발족되었다. 건준위가 주요하게 생각한 향후 사업은 4월 28일 평양회담, 6월 25일 서울회담을 통해 2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과 범청학련 결성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남당국의 극심한 방해책동으로 범청학련 남측건설준비위원회의 활동은 원활하게 가져갈 수 없었다. 7월 15일로 예정된 2차 실무회담을 팩스를 통해 진행하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사시키지 못하였으며 8월초에 이르러서야 8·15 청년학생통일대축전(서울)행사와 범청학련 결성식에 사용될 각종 문건들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결국 8월 15일 범청학련은 평양과 서울에서 결성을 선포하였는데 남측본부의 경우 대회장의 침탈로 결성식 하루 전에 의장이 연행되었고 장소를 옮겨가며 행사를 진행한데다 범청학련의 결성식이 시작되자마자 다시 또 대회장이 침탈되어 '너무 매워서 눈을 감고 결성선언문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선언한다'라는 얘기밖에 못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지 못할 눈물겨운 이야기들로 범청학련은 탄생의 순간을 맞았다.
이러한 범청학련의 결성은 기존에 진행되어오던 반국적 통일운동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였으며, 전민족적 통일운동체의 건설에 있어 청년학생들이 사명을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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