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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학생연맹(‘구학련’) 사건

제목(Title) :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61017


사건내용 : <사건경과>
-86. 03.29, ‘구국학생연맹 결성식’(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
-04.10,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결성
-04.28, 전압입소거부 투쟁 및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분신(신림4거리)
-05.21, 부산 미문화원 점거투쟁
-08.01, ‘기만적 헌법특위 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저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고려대)
-08.14, ‘8?15 민족해방절 기념식 및 기만적 헌법특위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반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
-08.15, 민민투와 공동 가두투쟁(남대문시장 및 신당동)
-08.17, ‘헌법특위분쇄와 조국통일촉진을 위한 범국민 실천대회’(인천 부평역)
-09.08, 고려대 ‘애국학생회’ 결성
-09.15, 연세대 ‘애국학생동맹’ 결성
-10.10, 구학련 ‘대자보’ 사건
-10.17, 경찰, 구국학생연맹 사건 발표
-10.28,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대사태(건국대)<사건경과>
-86. 03.29, ‘구국학생연맹 결성식’(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
-04.10,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결성
-04.28, 전압입소거부 투쟁 및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분신(신림4거리)
-05.21, 부산 미문화원 점거투쟁
-08.01, ‘기만적 헌법특위 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저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고려대)
-08.14, ‘8?15 민족해방절 기념식 및 기만적 헌법특위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반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
-08.15, 민민투와 공동 가두투쟁(남대문시장 및 신당동)
-08.17, ‘헌법특위분쇄와 조국통일촉진을 위한 범국민 실천대회’(인천 부평역)
-09.08, 고려대 ‘애국학생회’ 결성
-09.15, 연세대 ‘애국학생동맹’ 결성
-10.10, 구학련 ‘대자보’ 사건
-10.17, 경찰, 구국학생연맹 사건 발표
-10.28,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대사태(건국대)

<사건배경>
구학련의 결성과 이후의 활동노선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접근의 출발은, 길게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분출되어가던 학생운동진영내의 반미의식의 고양 및 선도적 반미투쟁의 흐름으로부터, 짧게는 85년말부터 본격화되어가던 학생운동의 한 경향인 소위 NL파의 조직적?사상적 흐름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양대 흐름의 조직적 결과물이 바로 구학련인 셈이기 때문이다.
첫째, 구학련은 위와 같은 학생운동의 흐름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서울대의 한 비합법조직체의 명칭이다. 그러나 이 조직이 상징성을 띨 수 있었던 이유는, 학생운동진영이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지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며 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5년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의 선도적 반미투쟁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학생운동의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전환은, 변혁이론적 차원에서 일정하게 북한의 주체사상적인 방법론을 수용케 했다. 이에 따라 구학련은 한국사회를 미제와 그 괴뢰정권 지배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하며 반제투쟁 우위의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을 정초했다. 구학련을 조직적 시발로 하는 NL파는 86년 이후 학생운동 내에서 대중적 확산을 하며 CA파(제헌의회그룹)로 대변되는 흐름과 한국사회의 기본성격, 주요모순 및 변혁론, 개헌국면의 정세 및 전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갈등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

<사건내용>
구학련과 관련된 내용기술 또한 학생운동진영의 반미운동 조직체로서의 그 실체와, 경찰이 발표한 ‘사건‘으로서의 구학련을 구분해야하긴 하지만, 구학련의 경우 다른 조직사건과는 달리 조직과 이념과 노선에 관한 한, 정부의 발표에서 드러나는 조작성과 과장성이 그리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먼저, 구학련의 태동 및 결성(86. 3.29,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은 서울대의 AI그룹(반제그룹)의 핵심인 단사그룹(서클 ‘단재사상연구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5년 말부터 단사그룹은 반제투쟁의 의의와 필요성에 대한 선전, 선동작업을 주요과제로 삼았으며 이러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모아 ‘반제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해방서시』), 『AⅠ 5항목』, 『민주주의 혁명(DR)』등 이후 학생운동의 NLPDR론의 기초가 될 이론적 문건들을 생산했으며, 85년말과 86년초의 겨울방학동안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그 결과, 단사그룹은 ‘민주학생연맹 준비위’를 결성하고 민족해방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조직명을 ‘구국학생연맹’이라 확정하여 결성식을 갖는다. 다음의 결성취지문은 구학련의 기본적 정치노선을 명확히 드러내준다.
“한반도는 19세기 말부터 분단을 거쳐 지금까지 일?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지배를 당해왔음에, 이들의 억압과 독점에 항거하여 분연히 투쟁하다 산화해 간 선배 순국영령들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 미제의 신식민지 파쇼통치의 매판적 반동집단을 타도하고 민족민주정부를 수립하여 모든 국민의 민주적 제 권리를 확보하고 진보적?민족자주적인 교육제도를 확립하며, 조국의 빛나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쟁취할 목적으로 『구학련』을 결성한다. 『구학련』조직원은 첫째, 한반도의 분단과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원흉으로서의 미제와 그 괴뢰정권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둘째로, 불요불굴의 투지와 셋째로, 필승불패의 신념을 갖고 구학련의 대오 아래 힘차게 전진하자.”(구학련 결성취지문 요약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 조직사건』, 아침, 1989, 147쪽에서 재인용.)
결성식에서 구학련이 채택한 강령 및 규약과 그 이후에 밝혀진 생활수칙 및 조직체계는 다음과 같다.

■강령
1. 미제의 신식민지-파쇼체제를 분쇄하고 민족의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1. 모든 국민의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1. 진보적이고 민족자주적인 교육제도 확립을 위하여 투쟁한다.
1. 모든 민족민주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하고 민중의 생존권 쟁취투쟁을 적극 지원, 연대투쟁한다.
1.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1. 제국주의의 모든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한반도의 평화옹호를 위하여 투쟁한다.
■규약
제1조 조직의 명칭은 『구국학생연맹』이라 한다.
제2조 조직의 목적은 열혈 애국청년학도의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는 것으로 한다
제3조 조직원의 자격은 반미구국투쟁에 헌신할 자로서 조직의 노선을 관철하고 조직의 규율을 준수할 사람으로 한다.
제4조 모든 조직원은 선거권, 피선거권, 의사개진권, 결정참여권을 가진다
제5조 조직원은 회비납부, 규율준수, 비밀사수, 결정집행의무를 갖는다
제6조 모든 조직원은 집행규율, 평가규율, 일상규율을 준수한다.
■생활수칙
① 모든 생활에서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조국과 민중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한다.
② 나쁜 습관과 주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명확한 책임성 하에 선도적 실천을 수행한다.
③ 비판과 상호비판으로 진정한 동지애를 구현한다
④ 약속시간 엄수 및 규율준수를 통해 절도있는 생활을 체현한다.
⑤ 자신의 몸은 해방전사의 몸임을 자각하고 음주?흡연 절제 및 알맞은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이상,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 조직사건』, 아침, 1989, 147-148쪽)
한편, 86년 10월 17일 경찰이 발표한 조직체계를 당시 한 일간지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는데, 위 자료와 별다른 차이는 없으나, 비합법 구학련의 공개투쟁기구이자 외곽조직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의 산하 부서들(민헌투, 노지연투, 반전반핵평투 등)을 구학련 직속의 산하기구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 조직체계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 (약칭 구학련)은 자민투의 배후조직으로, 鄭大和군(24?법대졸?구속)이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이론(AIPDR)을 조직이론으로 삼고 지난 (86년-필자 주) 2월17일 李明載군(22?경제과 3년?구속) 등을 포섭해 만든 좌경용공조직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이에 따라 鄭군 등은 지난 3월 29일 회원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갖고 강령-규약-일상생활 수칙 등을 채택했으며, 「중앙위」산하에 「투쟁부」, 「대외사업부」, 「선전부」, 「LT(노동투쟁)특별부」, 「5개지역위」 등의 조직을 두었다는 것이다. 또 산하 단체로 「민헌투」, 「노지연투(勞支蓮鬪)」, 「반전반핵평투(反戰反核平鬪)」를 두었으며 단과대학별로 담당지역을 분담, 제1지역(사회대, 가정대), 제2지역(인문대 경영대), 제3지역(법대 사범대), 제4지역(자연대 공대 약대), 제5지역(본부 서클 미대 음대) LT 담당을 두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각 지역위원회 밑에는 다시 산하에 1~4과까지 두어 업무를 분담해왔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86년 10월 18일자)

위와 같은 구학련의 노선 중 특이한 것은, ‘생활수칙’인데 이와 관련하여 구학련은 품성론과 반종파투쟁노선을 통해 당시 학생운동 내부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고 평가된다. 이는 ‘강철서신’과 자민투 기관지인 ‘해방선언’ 8호를 통해 요약화되었다.
“단결의 중심은 시류에 흔들림없고 정세에 우왕좌왕하지 않는 올바른 사상에 두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올바른 사상에 입각한 운동대오의 통일은 좌우편향을 배태시키는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종파주의를 불식시키는 불패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직적 단결의 매개가 00론, ××론이라는 이론이 아니라 사상이어야 하며 그 올바른 사상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종파주의를 반대하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운동의 승리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 그리고 백전불굴의 투지 등으로 표현된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50쪽)
이러한 학생운동 내부의 문화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반종파투쟁과 품성론은 당시 학생운동의 타성과 관성에 관련하여 일면 타당성이 있었으나 구학련의 ‘올바른 사상’의 실체 또한 일방적인 ‘북한추종론’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건, 이러한, 과거에 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조직 노선을 따라 구학련은 투쟁의 3대 영역-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을 설정하고 86년 초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그 시발은 86년 4월 10일 자민투의 발족이었다. 4월 이후 구학련은 자민투를 앞세워 팀스피리트 반대투쟁, ‘양키용병화’ 전방입소 반대투쟁을 위시로 반미자주화투쟁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를 본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4월28일 서울대 이재호?김세진 열사의 분신투쟁이 감행되었다. 86년 5월 구학련은 자민투 산하 ‘5월특위’를 신설하고 학살원흉처단투쟁 및 민주제개헌투쟁의 방향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이후 5월21일 부산미문화원 점거투쟁을 거친 후, 8월에 집중된 투쟁으로는, 8월1일 ‘기만적 헌법특위 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저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 8월 14일 ‘8?15 민족해방절 기념식 및 기만적 헌법특위분쇄와 망국아주경기 결사반대를 위한 백만학도 실천대회’, 8월 17일 ‘헌법특위분쇄와 조국통일촉진을 위한 범국민 실천대회’ 등이 있었다. 구학련의 이러한 활동은 타 대학에도 전파되어 구학련 노선에 기초한 고려대의 ‘애국학생회’(9월8일), 연세대의 ‘구국학생동맹’(9월 15일) 등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학련의 이러한 공개적이면서도 비합법적인 활동들은 정부 당국에 포착이 되었고, 특히 10월 13일 서울대 대자보사건과 10월28일 건국대 애학투련 결성식을 계기로 좁혀진 경찰의 수사망은 구학련의 실질적인 와해로 이어졌다. 정부는 자연스레 구학련을 소수의 반미좌경학생운동세력으로 규정하며 정권안보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활용하였다.
A6
-서진석(徐眞錫,21세, 서울대 지리학과 3년), 정대화(鄭大和, 24세, 법대졸, 중앙위원장), 이명재(李明載, 22세, 경제과 3년), 김영환(서울법대 82학번, 필명 강철), 배정환(서울법대 83학번), 박금섭(서울법대 83학번)


사건사전번호 : H-1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