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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종철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3'3대회)

제목(Title) : ‘고 박종철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3'3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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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발생일 : 19870303


사건내용 : <사건경과>
87.01.04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87.02.07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2?7 대회)

<사건내용>
1987년 3월 3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 신민당, 민추협, 재야단체와 대학생들에 의하여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고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3?3대회)이 추진되었다.
경찰은 6만명이 동원되어 원천봉쇄에 나섰다.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던 박군 49재에 참석하려는 승려들과 입구에서 저지하려는 경찰이 대치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안상수 검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은 침묵을 상징하는 ‘+’자 모양의 검은 반창고가 붙은 마스크를 쓰고 시가지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날의 특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 모양의 검은 반창고를 붙인 마스크였다. 신민당 이민우 총재를 비롯하여 국회의원들, 재야인사들이 그 마스크를 쓰고 경찰과 충돌하는 장면을 신문과 TV로 보았는데 몹시 인상적이었다. 불교 5단체가 주동이 된 49재 봉행준비위 소속 승려와 신도 등 200명이 박군의 영정을 앞세우고 조계사 부근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신민당과 민추협 인사들은 풍선을 들고 행진하는 특이한 시위도 벌였다.”
민추협 간부들은 가택연금을 피하고자 2일 밤 대부분 귀가를 하지 않고 외박을 한 뒤 다음 날 집결하였고, 비폭력 추도 행진을 위하여 소형 태극기와 비둘기가 그려진 ‘평화의 기’를 제작하여 수천 장 배포했다. 민주산악회, 민헌연 등도 파고다공원으로 행진했다. 계훈제 씨 등 재야인사와 김영삼, 김대중 씨 등은 2?7추대회 때처럼 가택연금되어 박군추도기도회를 열었다.
3?3대행진은 2?7추도회와 함께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박군의 죽음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민주세력들의 단합된 행동으로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박군 가족들은 3일 오전 10시 반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 사리암에서 신도 등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박군의 49재를 봉행하고 그 영혼을 천도하였다. (안상수,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 동아일보사, 1995, pp.129-130)
이 날 시위로 전국에서 439명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6월민주항쟁10주년사업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6월항쟁 10주년 기념자료집', 사계절, 1997, p.933)


사건사전번호 : H-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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