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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순(한신대 대학원 원우회장) 의문사사건

제목(Title) : 박인순(한신대 대학원 원우회장) 의문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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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발생일 : 19880623


사건내용 :
<사건내용>
박인순은 한신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원우회장을 활동하였다. 1988.5월에는 6?10 남북 학생회담을 준비하였고, 1988년 6월 23일 오전 10시 30분 경 도봉구 수유 5동 산 129번지 한신대 대학원 기숙사 217호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8년 6월 24일 서울 북부지청 검사 유○우의 지휘로 수사가 시작된 이 사건은, 1988. 6.25 한미병원 사체실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사 전○덕의 지도로 진행된 부검결과 사체가 너무 부패하여 사인을 규명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다만 외상이 전혀 없고 독극물 둥 또한 발견되지 않아 타살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1988년 7월 4일 종결되었다. 박인순의 형 박능출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박인순의 죽음의 진상를 규명해 달라고 진정하였다. 박인순은 1985년 10월 9일 광주광역시 소재 계림교회 대학부 회장을 하면서 민중가요집 「메아리」를 발행하였다. 또한 1987년 6월 20일자 건국대학교 영자신문에 「정부의 헌법개정 태도변화에 대한 반대-국민들은 민주적 헌법개정을 원한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때 정부가 군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였고,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박인순은 공안기관의 감시 및 추적을 받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부모와 가족에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나는 죽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박인순은 1988년 6월 10일 남북학생회담 한신대 대학원 대표로 참가하였고, 6?10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비상총회를 주도하여 공안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1988년 6월 23일 한신대 대학원 기숙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므로 그 죽음이 공권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결과 심폐기능의 정지로 인한 자연사로 판정되었으나, 사체의 상태는 새까맣게 된 상태이고 하체는 하얀색으로 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사망 원인에 의문점이 있어 그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것이다. 박인순은 1985년 전남대학교 재학 당시 계림교회 대학부 회장으로서 민중가요집 「메아리」1집을 발행하였고, 각종 집회 및 시위에 참석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서 박인순은 전남도경과 광주 동부경찰서 등으로부터 추적을 받았고, 정치폭력배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박인순은 1987년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한 후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여 삭발과 단식을 하였고, 같은 해 6월 10일부터 같은 달 29일까지 매일 을지로와 퇴계로 등지에서 호헌철폐,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인순은 경찰에 연행되어 집단 린치를 당한 바 있다. 또한 1987년 6월 20일 건국대 영자신문에 4?13 호헌조치에 대한 반박문인 「정부의 헌법개정 태도변화에 대한 반대-국민들은 민주적 헌법개정을 원한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였다. 1988년 5월에는 한신대 대학원 대표로 ‘6?10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비상총회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6월 한신대 대학원 원우회장의 자격으로 6?10 남북학생회담 관련 집회 등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박인순은 1987년 한신대에서 ‘한국사회연구회’ (이하 ‘한사연’)를 조직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한사연의 취지는 사회과학과 신학을 접목시켜 군사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신앙적 기틀을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사연은 한신대 내에서 일주일에 1회 이상 모여 철학사?해방신학?민중신학?대중운동론?주체사상 등 실천적 신앙인을 위한 신학적 이론을 학습하였고, 다른 대학(장신대대학원, 연대 신학대학원, 감신대, 이대 기독교학과, 총신대 등)과 전체적으로 공유하는 모임을 2주일이나 한달에 1회 정도 갖기도 하였다. 박인순은 한사연 회원으로서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 이후 같은 해 6월 10을 거쳐 6?29 선언이 있기까지 매일 시위를 하고 단식농성과 삭발농성을 했었다. 박인순은 일주일 간 단식으로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으나 몸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매일 퇴계로와 종로 등으로 나가 같은 해 6월 10일까지 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있다. 이 과정에서 박인순은 삭발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집단린치를 당한 적이 있다. 또한 시위자 전원이 도로에 드러누워 시위를 하다가 연행된 후 훈방된 사실도 있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박인순은 수시로 구타를 당했는데 그때 이후로 가슴을 아파했다. 또한 박인순은 1988년 ‘6?10 남북학생회담’에 원우회장 자격으로 참가하는 과정에서 같은 해 6월 9일 밤샘농성을 하였고, 같은 달 10일 연신내를 거쳐 임진각으로 가던 도중 경찰의 저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박인순은 사망하기 전날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와서 동료들과 막걸리 한 잔을 마신 후 “가슴이 답답하다”, “자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 1988년 6월 22일 새벽 4시경 “가슴이 답답하다, 자고 싶다, 들어가 쉬어야겠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간 후 같은 해 6월 23일 오전 10시 30분 경 박인순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박인순 사망 후 한신대 대학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박인순 사망원인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당시 사망원인과 관련하여 통일교 관련설, 독극물에 의한 살해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이와 관련하여 확인된 바는 없다. 박인순은 당시 제5공화국 및 제6공화국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에 적극 항거한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 이전의 행적에서는 박인순이 민주화운동을 한 사실이 인정되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박인순이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다. 박인순은 사망하기 전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가슴이 답답하다, 자고 싶다”고 하며 방으로 갔고, 시체가 발견된 기숙사 217호 방문 및 창문의 잠금장치가 안으로 잠겨 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사체검안서와 부검의사의 의견에서도 심장마비 또는 부정맥에 의한 돌연사로 추정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박인순의 사망은 외인사라고 볼 수 없으며, 공권력이 개입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2000.10~2002.10) Ⅱ권', 2003, 737~746쪽)


사건사전번호 : H-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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