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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남북학생회담 무산사건

제목(Title) : 6·10 남북학생회담 무산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80610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8.3.29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중기 후보, 남북대학생 공동체육대회 및 국토순례대행진 제안 / 1988.4.4 김일성대학 학생위원회, 김중기 후보 제안 수락 / 1988.6.10 6·10 남북학생회담 경찰 저지로 무산 / 1988.8.12 전국 22개 대학생 8·15출정식 갖고 가두시위

<사건배경>
1988.3.29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유세과정에서 김중기 후보는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북한 국토종단 순례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를 제안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는 4.4 “귀 대학교 총학생회의 제의가 민족적 화해를 위하여 유익하고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절실한 애국적 발기로 된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대들의 제의에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을 표시”하며 6.10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답하였다.(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돌베개 1991), 61쪽)

<사건내용>
일부 대학생들이 주도 계획하고 있는 ‘6·10 남북청년학생회담’예정일 전날인 9일 전국 60여개 대학생 1만여명이 연세대에 집결, 밤을 세우며 10일 판문점 강행을 다짐했다. 경찰은 이들이 판문점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연세대 주위를 포위 봉쇄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장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는 9일 연세대에서 ‘6·10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결의대회’를 갖고 경찰의 저지방침에 관계없이 10일의 행사를 강행키로 결의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시위를 계속하다 교정으로 돌아가 토론회를 가지며 밤을 새웠다. 학생들은 학교밖에 있었던 3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하자 이들을 지원키 위해 교문을 나서려 했으며 시위과정에서 학생 10여명이 부상했다. (조선일보 1988.6.10)
1988.3.29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유세과정에서 김중기 후보가 제안한 남북한 국토종단 순례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에 대해 김일성종합대학이 수락하자, 6·10회담 성사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4.16에는 ‘한반도 평화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국민대토론회’가, 4.18에는 4·19 혁명 26주년을 기념하여 고려대-수유리 구간에서 서총련 산하 서울지역 대학생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린 통일구국대장정 마라톤 대회를 가졌다. 조국통일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14 전국의 6개 지역 120여 대학 학생대표를 비롯한 2만여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고려대에서 전대협 주최로 ‘6·10 남북 청년학생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림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학생 결의대회’가 열려 6·10회담이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 애국 청년학도의 의지임을 확인하였다. 이날 전대협은 ‘남한의 백만 청년학도가 북한의 청년학도에게 보내는 3차 공개서한’을 통해 반통일주의자 미국과 노태우에 대한 투쟁선언, 통일의 당위성 선언, 회담의 구체적 안건과 실무대표단 구성 및 일시 등을 백만 청년학도의 이름으로 공식 확정하였다. 그와 함께 전국 각 대학에서는 남북 학생회담 성사를 지지하는 집회가 계속 열려 통일운동의 절박성이 점차 고조되면서 학우들의 참여가 가속화됐다. 회담이 임박하면서 6·10 회담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아지는 반면 노태우정권이 이를 막을 명분은 점차 사라져 갔다. 전대협과 남한지역 대표단은 6.4부터 5차례의 기자회견과 긴급제안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학우들의 결의수준을 높여 나갔다. 이들은 “남한당국은 국무회의 발표대로 남북 청년학생의 상호교류를 인정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6·10 남북 학생회담에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보내야 할 것”이라 발표하며 이를 위해 ① 6·10 회담의 정당성 인정 ② 대표단의 인정, 대표단에 대한 수배조치의 해제 ③ 회담의 원천봉쇄 철회 및 판문점으로의 자유로운 통행 보장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은 6·10 학생회담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는 한편 현재 준비 중인 남북학생 체육회담을 취소하면 남북한 학생간의 교류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히는 등 정권유지 차원의 이른바 ‘창구 단일화’ 원칙만을 되풀이하는 기만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6.9 오후 10시 연세대에서는 ‘6·10 남북 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회담 당일인 10일 오전 10시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익환 의장, 불교계 대표 지선, 진관 스님 등 각계 인사들과 전국 각지의 2만여 명의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출정식이 열렸다. 출정식을 통해 조국통일투쟁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진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김중기 단장을 선두로 판문점을 향해 교문으로 나아갔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외치며 김중기 단장과 통일선봉대를 앞세운 행렬이 교문을 통과하려 하자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여 행렬을 저지했다. 경찰의 폭력 저지로 행렬이 흐트러진 뒤 학우들은 예고한 대로 오후 1시 30분 서울역 주변(1만여명)과 4시 홍제동 네거리(6천여명)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학우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6·10회담 성사시켜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치며 문산행 기차역과 불광동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학우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접근하면 팔에 팔을 낀 채 도로에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벌이며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데도 경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연행, 이 날 하루에 2명의 학우가 뇌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고 1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연행된 학우가 1천여명에 달해 노태우정권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한편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 역사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출정식을 갖는 도중 연세대를 출발한 남한 대표단의 이창림(부산지역 대표), 정재교(경인지역 대표) 학우는 오후 2시쯤 문산에 도착,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대기 중이던 경찰에 강제연행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방해로 6·10 회담이 무산된 뒤 연세대로 돌아와 철야농성에 들어간 학우들은 다음날인 11일 1시 ‘남한 학생회담 보고 및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학우들은 대회에서 노태우정권의 폭력적인 방해 책동을 규탄하고 ‘정당·사회단체에 보내는 촉구문’을 통해 6월 18일 고려대에서 제2차 남북 학생회담 성사, 공동올림픽 성사, 정당·사회단체·학생의 통일문제 협의기구 구성에 관해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6.18 전대협은 고려대에서 사회운동단체와 종교계, 평민당을 초청한 가운데 ‘조국통일을 위한 범국민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날 2천 5백여명의 시민과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김중기 대표단장은 토론을 통해 노정권의 반통일적 정책을 규탄하고 8월 4일부터 15일까지 계획된 국토순례대행진을 예정대로 진행시키겠다고 밝혔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돌베개, 1991, 61~65쪽)


사건사전번호 : H-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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