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

제목(Title) :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81117


사건내용 : <사건배경>
대통령 선거 이후 전면적인 농축산물 수입 자유화가 발표되지 1월부터 낙농·육우·농민들을 시발로 양계, 포도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입개방저지투쟁을 대규모로 벌이면서 생산자단체들이 처음으로 투쟁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후 농민운동단체들은 이들 생산자단체와의 상층연대를 통해 4.22 건국대에서 2천여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농축산물 수입저지 전국농민대회>를 공동 개최하고 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5.26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2천여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농축산물 수입반대 전국농민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양 대회는 수입개방에 대한 연대투쟁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점과 농민운동단체와 생산자단체들 간의 투쟁을 통한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연대투쟁은 많은 문제점을 보여 주었다. 우선 투쟁의 준비나 동원, 진행과정에서 농민운동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한 채, 생산자단체와 연대하여 대회를 치르는 데 급급했다. 따라서 구체적인 획득물도 없이 문제제기 차원에서 머물렀으며 지속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특히 생산자단체의 상층 지도부는 타협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면서 농민대중의 투쟁열기를 수렴하지 못했고 농민운동단체조차 통일된 전술 지침을 가지고 이를 견인하지 못했다. 이후 한미무역실무회의를 통해 쇠고기, 유제품, 과일류, 담배 등 농축산물 수입이 전면화됨에 따라 생산농민들의 위기는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작목별 생산자단체들 역시 공동대처를 절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정부협상 차원에서 얻어낼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생산자단체 지도부는 그간의 타협적, 기회주의적 성향에서 점차 탈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난 10.31 한국낙농육우협회, 한국육우협회, 대한양돈협회, 전국계우회연합회, 한국포도회,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한국유기농업환경연구회, 전국생약재생산농민동우회, 전국육계안정협의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 전국농민협회, 가톨릭여성농민회 등 13개 농민단체들은 <전국농민단체협의회>를 결성했다. 협의회는 농업-농민의 전반적인 생존권적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범농민적 연대, 특히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투쟁의 공동수행을 중점적인 과제로 설정하였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5공청산과 악법개폐투쟁', 기사연리포트 10호, 민중사, 1988, 169~170쪽)

<사건내용>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출범하자마자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와 제값받기를 위한 전국단위의 농민대회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난 봄 농민대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측면에서 보다 발전된 사전준비가 진행되었다. 우선 농민대회의 공식프로그램에 여의도에서 미대사관까지의 평화적 시위행진을 포함시켰다. 둘째, 각 단체의 연대투쟁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참여 규모를 사전에 점검하고 대회시 단체별로 대오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예산된 참여 인원은 1만여명이었으나 실제로는 2만여명이 참여했다. 셋째, 전국 각 군에 걸쳐 농민의 참여가 계획적으로 준비되었다. 각 군마다 농협에 압력을 가해서 필요한 경비를 제공케 하거나 대절버스로 농민을 수송하였다. 또한 <농축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원회>, <토지무상양도 전국대책위원회>,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 <전국수세폐지 대책위원회> 등이 함께 가담하게 되었다. 넷째, 서총련 농민분과, 전국 대학 4H연구회연합회, 수원지구대학생협의회 농민분과, 중부지역 농촌관련 동아리협의회 등으로 <전국농민대회를 위한 학생지원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 대표가 대회준비위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조직적인 지원활동이 이루어졌다. 여의도 광장에서 12시30분에 식전행사로 농악놀이가 시작되면서 각 단체들이 속속 집결하여 대오를 갖추게 되자 1시부터 대회가 진행되었다. 각 생산자단체와 수세폐지대책위, 의료보험대책위, 농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의 입장발표가 있은 후 각 정당에서 농업문제에 대한 공식정책을 밝히는 순서가 있었으나 민정당은 불참하였고 세 야당 역시 농민들의 거센 야유와 비난만 받고 말았다. 대회가 끝난 후 고추생산비보장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한 농산물 제값받기 경북농민대책위를 선두로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길이 1,390M의 마포대교를 완전히 메우고도 남는 대규모 행렬은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구 서울고등학교까지는 경찰과 충돌없이 한쪽 차도를 차지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광화문네거리를 100M 남겨놓고 무장경찰의 저지선으로 행진이 차단되었다. 이후 농민들은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약 500여명의 농민들은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돌과 화염병, 각목 등으로 맞서 싸웠다. 미대사관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농민들은 농협중앙회를 점거하였으며 당일 새벽부터 고추수매를 요구하며 농협점거농성에 들어와 있던 해남·진도 지역의 농민과 함께 약 400여명이 농성투쟁을 하였다. 농민들은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농협중앙회장과 간부들을 불러놓고 농협의 반농민적 죄악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농협중앙회장은 “이제까지 농협이 정부와 재벌의 시녀로 추락하여 반농민적 활동으로 일관해 왔음”을 시인하고 농협에서 발표한 추곡수매가 19.3% 인상안도 생산비 계산에 근거하지 않은 것임을 자백하였다. 농민들은 농협중앙회장으로부터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와 제값받기 운동에 농협이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적극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문서와 녹음으로 기록하고 농성을 끝냈다. 농협농성은 계획적으로 준비되어 진행된 것은 아니나 농민들의 원성을 사온 농협중앙회를 처음으로 점거하고 농협 민주화를 위한 농민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제기한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해남, 진도의 농민들은 고추 100톤의 추가수매를 확약받고 농성 사흘째 되던 날 모두 해산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5공청산과 악법개폐투쟁', 기사연리포트 10호, 민중사, 1988, 171~172쪽)


사건사전번호 : H-1192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