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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6공화국 재개발비리만행 폭로규탄 및 깡패철거 결사저지대회

제목(Title) : 제5, 6공화국 재개발비리만행 폭로규탄 및 깡패철거 결사저지대회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81116


사건종료일 : 19881117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8.11.16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 1988.11.17 성공회 서울대성당

<사건배경>
올림픽 때문에 주춤했던 강제철거가 10월에 들어 다시 진행되었고 이를 저지하려는 도시빈민들의 피나는 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그간 공사의 지연으로 자기 부담이 늘어나는 것에 노심초사하던 건설 재벌들은 재개발사업 자체가 둔화될 기미를 보이자, 깡패를 동원한 폭력철거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해 도시빈민들은 깡패철거 결사저지의 결의를 굳건히 하고 지역간의 연대를 통한 상호지원투쟁을 벌여 나갔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5공청산과 악법개페투쟁', 기사연리포트 10호, 민중사 1988, 177쪽)

<사건내용>
올림픽 직후인 10월 4일, 상계동 철거민의 이주 정착지인 남양주군 별내면에 군청 철거반 100여명이 들이닥쳐 20동의 천막 중 11개 동을 철거했는데 그곳에서의 15번째 철거였다. 10월 6일, 광명시 하안동에서는 철거반과 주민들의 충돌로 주민 6명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 10월 12에 목2동, 14일 대현동, 18일 신정2동, 19일 문정동, 27일 신가촌, 29일 다시 대현동, 30일 홍은동, 11월 5~8일 사당2동 등의 순서로 강제철거가 연이어졌다. 특히 대현동과 사당2동에서 벌어진 철거깡패의 만행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1) 대현동
10월 14일, 이화여대 입구 대현동 재개발지역에 사전예고도 없이 철거깡패 300여명이 몰려와 철거를 시작했다. 철거깡패들은 저항하는 주민들을 가옥주, 세입자 할 것 없이 집단구타하고 심지어는 가재도구도 꺼내놓지 않은 집을 통째로 포크레인으로 밀어부쳤다. 피해보상과 이주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항의하던 한 주민은 전치 8주의 부상을 입는 폭행을 당했다. 그후 29일에는 임시숙소로 마련한 천막 마저 다시 철거깡패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다.
2) 사당2동
11월 5일 오전 9시경 1천여명의 철거깡패가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시작된 강제철거로 주민 20여명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튿날인 6일에도 식칼을 박은 각목을 휘둘러대는 철거깡패들과의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 이틀 동안 주민 100여명이 크게 다쳤다. 철거반들은 부녀자의 옷을 찢고 유방에 칼을 들이대며 성적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나일론 끈으로 묶고 구덩이에 밀어 넣은 뒤 짓밟고 각목으로 때리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주민에게 잡힌 한 철거반의 말에 의하면 동작구청장이 “하루에 거적대기 3개가 나와도 책임질테니 마음껏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강제철거가 진행되는 동안 각 지역에서는 <강제철거 결사저지 결의대회> 등을 통해 투쟁 의지를 결집해 나갔다. 10월 9일에는 도화 1공구, 16일 서초동, 22일 신가촌, 24일 구로동에 이어 홍은동, 봉래동 등지에서 강제철거를 규탄하고 지역 수호를 다짐하는 주민단합대회들이 치러졌다. 또한 사당2동을 사수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서총련 학생들의 튼튼한 연대가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는 11월의 투쟁방향을 두 가지로 설정하였다. 첫째, 한 지역에서 강제철거가 자행될 때 서철협의 전 역량을 동원하여 맞서 싸움으로써 완강한 대응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대규모 집회를 통해 건설재벌, 행정관리, 경찰 등 폭력철거의 주동자들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술의 방향 위에서 서철협, 천주교도시빈민회,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 전국노점상연합회 등으로 구성된 <도시빈민공동투쟁위원회>는 16일, 17일의 대규모 투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제5, 6공화국 재개발 비리만행 폭로규탄 및 깡패철거 결사저지대회) 전농동, 신정동, 대현동, 사당동 등에서 벌어진 깡패철거의 폭력성을 규탄하고 결사저지의 투쟁의지를 결집, 과시함으로써 앞으로의 공격에 쐐기를 박는다는 목적에서 11월 1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가 개최되었다. 서초동, 돈암동, 도화동, 구로동 등 자기동네를 나타내는 만장과 플래카드, 피켓 등을 든 1,200여 명의 주민들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철거 현장에서 죽어간 15명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이 자리에서는 87년 4월 30일 상계동에서 압사한 오동근 군의 어머니가 나와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오후 1시 경 주민들은 15명의 위패와 철거민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앞세우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여 그곳에서 대회를 속개했다. 이 날 각 지역의 <세입자대책위원회> 청년들은 <강제철거저지 청년결사대>를 발족하고 투쟁의 선봉에 설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들의 선도로 전두환, 이순자, 철거깡패, 투기꾼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오후 6ㅅ;경까지 계속된 이 날 대회는 다음날 시청 농성을 확약한 후 자진해산했다.
(서울시청 앞 농성투쟁) 11월 17일 오후 2시, 성공회 서울대성당에 집결한 각 지역 주민 600여명은 “깡패철거 방조하는 서울시청 자폭하라”. “살인철거, 살인만행 서울시장 구속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청 앞으로 행진했다. 순식간에 도로는 차단되고 시청 앞 광장은 주민들의 구호와 노랫소리로 뒤덮혔다. 연좌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은 오후 3시 30분 경 폭력철거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시장면담을 시도했으나 전경들의 저지로 밀려났다. 주민들은 오후 6시경까지 도로를 점거하고 차량통행을 막으면서 전경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까지 진출, 가두시위를 벌이다 자진 해산했다. 16일, 17일 양일간의 대규모 집회를 통해 확인된 도시빈민들의 결집된 힘은 강제철거 저지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앞으로 있을 철거 음모를 중단시켰다. 11월 18일, 25일일로 예상되었던 신정2동과 신림 10동의 강제철거는 이 대회 후 이루어지지 못했고 11월 23일 도화 1공구에서 자행된 부분적인 강제철거는 주민들의 연대투쟁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로써 그간 진행되던 강제철거는 일단 중단되게 되었다. 10월~11월 주거권 쟁취투쟁의 정점을 이룬 16, 17일의 집회는 ‘강제철거 저지’와 ‘주거 근본대책 쟁취’라는 두 개의 요구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5공청산과 악법개폐투쟁', 기사연리포트 10호, 민중사, 1988, 178-182쪽)


사건사전번호 : H-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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