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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산업노동자 집단분신사건

제목(Title) : 경동산업노동자 집단분신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90904


사건내용 :
<사건배경>
인천시 서구 가좌동 570-10, 인천교 옆에 위치한 경동산업은 서울 서초동 본사와 영등포에 A공장이 있으며 인천에는 주로 양식기와 주방용품을 생산하였다. 일반인에게는 키친아트라는 상표로 잘 알려진 회사로 경동산업은 삼환기업, 삼환까뮤, 삼환종합기계, 우성개발 등의 계열회사를 가지고 있는 삼환그룹의 계열회사이며 그룹회장인 최종환은 전경련 부회장이었다. 1970년대 이후 급성장해 세계최대의 주방용품 생산업체로 성장하여 사장 최경환은 아시아 양식기협회 회장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88년 내수판매가 70% 이상 증가하는 등의 초고속 성장을 보여주었으며 최근 매출액만 900억이 넘었다. 그러나 경동산업의 작업공정은 대부분 프레스와 연마로 되어있기 때문에 산업재해의 위험이 다른 회사에 비해 월등히 많아, 80년 초에는 B공장 함마기계에서 마루가 튀어올라 그 자리에서 노동자가 즉사하였으며 83년 C공장 압연부서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 노동자의 머리카락이 기어에 빨려 들어가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뇌가 손상돼 식물인간이 된 사건 등 이외에도 끔찍한 산업재해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의 부주의로 돌리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는커녕 동일업종 다른 회사에 비교해서도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1989년 9월 이전의 노동자들의 투쟁과 구사대 폭력> 1984년 10월경 한덕희, 정명자를 비롯한 몇몇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을 위하여 뜻있는 노동자들을 규합하다가 회사에 발각되어 부서 이동과 폭행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85년 1월 14일 드디어 노동조합 결성식을 갖고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온갖 협박과 매수를 통해 구사대를 위원장과 사무장에 내세워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회사 측은 이후 노조 결성을 주도한 노동자들 2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시켰고, 어용노조를 동원해 비협조적인 노동자를 폭행하였으며, 170여 명의 구사대를 조직, 공장 주위를 24시간 감시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탄압에 나날이 쌓여가던 경동 노동자들의 분노는 마침내 1987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14일에 걸친 임금인상 및 민주노조 쟁취투쟁으로 폭발하였다. 폭력 구사대가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장 앞마당으로 돌진해 들어왔으나 어깨뼈가 으스러지고 이빨이 부러지는 폭력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끝까지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1987년 경동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독 완강한 투쟁성과 무장력으로 유명한 이면에는 이러한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쌓일대로 쌓인 노동자들의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1987년 8월 30일 협상 당시 “민, 형사상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던 사장 최경환은 이 모든 약속을 저버렸다. 그리고 오후 3시경 노동자들이 작업에 열중한 틈을 타 술취한 200여 명의 각목부대를 동원 노조사무실을 난입하였다. 정정안은 그들에게 맞아 피범벅이 되어 실신하였고, 집행부 8명이 대기 중이던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리고 회사측은 편법을 동원해 김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어용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1987년 9월 11일 구사대의 폭력과 경찰에 의해 경동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건설은 일단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민주노조 쟁취투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속 노동자들은 석방되자마자 대열을 정비하고 ‘부활 인천교 소식’을 발행하는 등 치열한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4월 12일 해고노동자 3명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회사 측은 폭력으로 안 되자, 적자운운하며 고의로 잔업을 없애고 야간근무를 축소하는 등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동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이러한 기도를 분쇄하기도 하였다. (??전노협 백서')

<사건내용>
1989.9.4일 오후 인천 주방기기 제조업체 경동산업 본관 3층 강의신 노무관리 이사실 입구에서 이 회사 근로자 강현중 씨 등 5명이 온몸에 신나를 뿌린 채 강이사에게 자신들에 대한 징계방침철회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몸에 불을 붙혀 이들 5명과 강이사 등 6명이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또 근로자 강씨 등이 분신하는 것을 보고 흥분한 동료 근로자 최운규씨 등 2명이 노조사무실 앞 운동장에서 과도로 자신의 배를 찔러 중상을 입고 동인천 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조선일보 1989.9.5)
지난 4일 경동산업 근로자 집단분신 사건으로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이 회사 노무관리이사 강의신씨(50)와 근로자 강현중(26)씨가 9일 각각 숨졌다.(위 신문 1989.9.10)

1989년 임금인상 투쟁시 경동의 노동자들은 회사와 야합하려는 어용조노에 맞서 자발적으로 임금인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김치원 어용노조 집행부는 임금인상대책위를 해산시키고 파업을 요구한 조합원들의 뜻에는 아랑곳없이 1400원의 중재안을 멋대로 타결해 버렸다. 이에 평조합원 임금인상대책위원 출신을 중심으로 5월 14일 ‘디딤돌’이라는 친목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노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딤돌은 회사와 어용노조의 감시와 탄압 속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6월 6일 지역 노동자 축구대회, 8월 3일 인노협 수련회 참석 등으로 서서히 영향력을 높여가자 회사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디딤돌은 8월 ‘경동가족 한마당’이라는 일일찻집을 개최하고자 8월 11일부터 티켓 판매를 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기계실 정과장과 용접실 손과장이라는 자에게 한 회원이 티켓을 빼앗기고 무릎이 꿇리는 등의 모욕을 당하자 디딤돌 회원들이 강력히 항의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같은 상황 하에서도 8월 27일 ‘경동가족 한마당’이 진행되었지만 곧 회사측의 탄압은 디딤돌 회장 강현중, 부회장 유원식, 총무 안중준에게 사유도 게재치 않은 징계위원회 출석 요구서를 발송하는 것으로 노골화되었다. 이에 디딤돌 회원 전원은 “조합원이 당당하게 대접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해 전 회원의 해고를 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고 모두가 혈서를 쓰고 투쟁을 다짐하였다.
<8월 31~ 9월 4일 농성투쟁 경과> 8월 31일 “디딤돌이 조합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저녁 10시경 구사대가 무력으로 난입을 시도했으나 목숨을 걸고 물리쳤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금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는 결의를 하였다. 9월 1일 야간조 점심시간을 이용 조합원들에게 농성의 의미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회사는 야간조를 새벽 5시 30분에 퇴근시켜 버렸다. 경찰 투입 소식이 전해지자 회원들은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9월 2일 아침 디딤돌을 악선전하는 노조 측의 유인물이 배포되자 회원대책회의를 열었다. 오후 사측과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자 만장일치로 전면투쟁을 선언했다. 9월 3일 몇 차례의 협상이 있었으나 역시 결렬되었고 계속 구사대와 힘겨운 전투가 벌어졌다. 9월 4일 밤새 계속된 싸움으로 피로에 지친 회원들은 그럼에도 부상자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회사와 노조는 소위 “노사확대간부회의”라는 것을 열어 (1) 노사 공동대처, (2) 농성자 통제 등을 합의하고 “해고자 유인물 배포 방어 대책 조직 구성”을 짜놓았다. 이러한 회의의 결과에 분노한 농성자들은 생산부 사무실로 내려갔다. 곧 200여 명의 관리자와 구사대가 그들을 에워쌌다. 농성자들은 그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온몸에 신나를 부었다. 주위에 있던 동료 조합원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노조 사무실에 달려갔으나 이미 어용집행부는 도망가고 없었다. 순간, 4층 노무이사 사무실에서 불길이 치솟고 온몸에 불이 붙은 강현중이 뛰어내렸다. 뒤를 이어 김종하, 안중준, 이종화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악질 자본가의 악랄한 탄압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였다. (??전노협백서')


사건사전번호 : H-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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