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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사장 퇴진요구 KBS노조 무기한제작거부투쟁

제목(Title) : 서기원사장 퇴진요구 KBS노조 무기한제작거부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900413


사건내용 :
<사건배경>
노태우 정권의 KBS에 대한 재장악 음모는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 들여 군사정권의 연장을 획책한 3당합당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3당합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전복하는 데 성공한 정권이 다음으로 계획한 것은 87년 이후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조합을 비롯한 민중운동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노동조합을 고립시키고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의 충실한 대변자 역할을 거부하는 방송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90.4.0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소극적인 서영훈 사장을 퇴임시키고 오랫동안 독재정권에 몸담아 온 서기원을 임명한 것은 5월로 예정된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전 정지작업을 끝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간단하게 해결될 줄 알았던 KBS 재장악 작업은 상상밖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다른 방송사 노조의 연대파업으로 번지면서 오히려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도하는 모양새로 바뀌고 말았다. (방현석, ??아름다운 저항 -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194쪽) KBS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87년 6월 민중항쟁이었다.
88.5.20, 노동조합을 결성한 KBS 노동자들은 진실을 말하는 명예로운 방송 만들기에 나섰다. 89년에 방송된 ‘광주는 말한다’ 프로그램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외부기관의 협박을 물리치고 ‘광주를 말한다’를 방영한 KBS 노동자들은 ‘조선대생 이철규 의문사사건’에 대한 국회조사단의 관계자 신문내용에 대한 생방송을 요구하며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시녀언론을 거부하고 민주방송으로 거듭나려는 이 같은 몸부림을 그대로 방치할 정치권력이 아니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연예 PD를 구속한 것은 노태우 정권의 KBS 재장악을 위한 첫 번째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뒤 이어서 법정수당 변칙지출 문제를 부풀려서 KBS 전 직원이 불법으로 공금을 착복한 것처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여론을 KBS 노동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진실의 본질은 아니었다는 KBS의 해명은 통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노태우 정권은 KBS를 확고하게 재장악하기 위한 마무리 수순으로 첫 민선 사장인 서영훈을 퇴진시키고 서기원을 임명했다. 서기원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앞장서서 가담해 온 인물이었다. (방현석, ??아름다운 저항 -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187~188쪽)


<사건내용>
경찰병력 900여명이 12일 오전, 서울 KBS 한국방송공사에 들어가 신임 서기원 사장의 출근을 저지하던 노조원 117명을 연행한데 대해 KBS 사원들이 항의, 제작거부를 결의해 실행에 옮기는가 하면 방송 중인 스튜디오 안에 노조원들이 들어가 침묵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12일 밤 9시 뉴스가 중단되는 등 방송운행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조선일보 1990.4.13)
공보처는 13일 KBS 사태에 관한 정부 입장을 발표, KBS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신임사장의 취임을 거부하는 KBS 노동조합의 불법적인 업무집행방해 때문에 서기원 사장이 요청함에 따라 행해진 적법한 질서유지 조치라고 전제, KBS 노동조합은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법률에 따른 엄정한 조치가 불가피함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 신문 1990.4.14)
경찰은 30일 오후 사원총회의 분위기가 정상화 방안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자, 여의도 KBS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 사원들이 투표결과가 예상대로 부결쪽으로 나타나자 개표종료 2시 30분만에 KBS에 들어갔다. 경찰은 30일 밤 11시 15분 ‘여의도 진압작전’으로 명명된 KBS내 농성사원 강제해산 작전에 들어가 50여분만에 본관2층 로비에서 농성중인 사원들을 전원연행했다. 경찰은 연행자 330명을 버스 10대에 30여명씩 분승시켜 연행시작 20분만인 12시 정각 KBS를 떠나 서울시내 11개 경찰서에 수용했다. 연행자 중에는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2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 맨하탄 호텔의 임시사무실에 머물러 있던 서기원 사장은 경찰투입 5분만인 11시 20분쯤 6층 사장실로 들어와 실국장단 50명을 소집, 긴급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다. 서사장은 이 자리에서 어쨌든 공권력 투입이라는 결과를 낳아 착잡하다며 연행과정에서 한 사람의 부상자도 생기지 않도록 경찰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위 신문 1990.5.1)
1990.4.12은 언론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KBS에 1천여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한 정권은 1백17명의 조합원을 강제연행하고 백골단의 호위 아래서 서기원 사장의 취임식을 강행했다. KBS 노동자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시위대학생들처럼 옷자락을 거머잡힌 채 일렬로 서서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그리고 또 다른 방송의 화면을 통해 보았다. 지금까지 개개인이 겪어왔던 깊은 모멸을 집단으로 체험한 KBS 노동자들이 실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역사적 투쟁을 시작한 것도 이날이었다. PD는 제작하던 프로그램에서 손을 뗐고, 기자는 펜을 놓았으며,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2~3백 명뿐이 모이지 않던 민주광장에는 매일같이 3~4천여명의 조합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튿날 오전, 90분짜리 프로그램인 KBS 2TV 생방송 조간뉴스 ‘전국은 지금’이 27분만에 종료되었고 1TV 7시 뉴스는 진여옥 아나운서가 불참한 가운데 45분 방송이 19분만에 중단되었다. 교양국과 기획제작국을 비롯한 제작자들은 서기원 퇴진과 구속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4.30, 19개 중대 3천여 명의 병력이 동원된 2차 병력 투입으로 3백33명의 조합원들이 연행될 때까지 KBS 노동자들은 온갖 회유와 분열책동을 물리치고 굳건하게 투쟁했다.
2차 경찰 투입 직후 MBC 노조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고, 그 결의에 따라 5월 1일 10시에 비상총회를 열어 전면제작거부에 들어갔다.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4.23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 노조도 같은 날 MBC와 동시에 제작거부에 돌입하여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 내보냈다. 이처럼 방송노동자들이 연대파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6월 민중항쟁을 계기로 쟁취한 방송민주화의 성과를 지켜내느냐, 무기력하게 권력과 자본의 시녀로 돌아가느냐는 갈림길로 KBS 투쟁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6일간 계속된 유례없는 방송노조의 연대파업은 민중들의 피로 쟁취한 민주화의 흐름에 무임승차한 빚을 당당하게 갚느냐, 아니면 다시 익숙한 굴종과 자기기만으로 돌아가느냐에 대한 실천적 결단이었다. KBS 90년 4월 투쟁은 비록 서기원 사장의 취임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쌓인 조합원들의 단결, 배출된 지도역량, 연대투쟁의 지평확대는 이후 지속적인 방송민주화투쟁의 튼튼한 발판이 되었다. (방현석, ??아름다운 저항 -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188~190쪽)


사건사전번호 : H-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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