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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환(원진레이온 노동자) 직업병인정투쟁 및 사망사건

제목(Title) : 김봉환(원진레이온 노동자) 직업병인정투쟁 및 사망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910105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38년 12월 11일 출생
1977년 12월 22일 원진레이온 입사 (원액2과 근무)
1990년 9월 퇴사 후 쓰러져 말을 더듬기 시작
1990년 11월 26일 사당의원에서 이황화탄소 중독 및 고혈압 진단받음
1990년 11월 27일 노동부와 회사 측 요양신청 거부
19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 접수 통보받음
1991년 1월 5일 오후 1시경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밤 10시 30분경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사건배경>
원진레이온은 1964년 흥한화학섬유(대표 박흥식)가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방사기계(56년산)를 들여오면서 설립되었다. 아황산탄소 중독을 발생시키는 레이온기는 일본에서 6년 동안의 풀가동으로 이미 대강의 감가상각이 지난 중고기계를 들여옴으로써 설립당시부터 직업병 발생 소지를 갖고 있었다.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일만이 아니라 이황화탄소가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무방비 상태의 작업환경에 노동자들을 방치해 왔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81년 2월 생산부, 방사과에 근무하던 홍원표씨가 최초로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환자로 밝혀졌다. 82년에는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중대재해가 발생되었으며, 87년 1월에는 서용선, 정근복, 강희수 씨 등 11명의 원진노동자가 중증 마비상태에서 회사로부터 강제퇴사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청와대 진정을 통해 직업병 환자로 판정받은 후 산재혜택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1만5천여명의 원진레이온 출신 노동자 가운데 특수건강검진을 받고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판정을 받은 노동자는 88년에 14명, 90년에 34명, 92년에 96명, 93년에 110명, 94년 5월 2일 현재 42명, 모두 359명의 직업병 환자들이 소리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359명 중 16명이 사망했으며, 16명의 사망자 가운데 2명은 직업병 고통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했다. 88년 이전에 사망한 노동자들 대부분이 병의 원인을 모르고 사망하였다. (직업병대책과 고용보장쟁취를 위한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얼룩진 원진레이온 이력서', 1994, 20~33쪽)

<사건내용>
김봉환은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원액2과 근무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황화탄소 중독 초기 증상인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저림 등의 증상으로 83년 퇴사하였다. 이후 다른 일을 하던 김봉환은 89년 쓰러진 이후 말을 더듬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직업병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어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 노동자협의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판명을 받아 회사 및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을 하였지만 거절당하다가 91.1.5 노동부로부터 산재요양 접수통보를 받은 그 날 사망하였다. 김봉환 사망이후 진상규명과 함께 직업병 피해자의 발생을 근절하기 위하여 10개 단체가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망사건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대책위는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이다’라는 정확한 진단을 하기 위해 그동안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판정을 해 온 고려대 부속 혜화병원에 의뢰하여 병리학교실에서 부검의뢰하기로 하고 부검시 직업병 4인 판정위원회의 참관과 신체부검결과에 대한 회사측의 인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혜화병원측은 뚜렷한 이유없이 거부하였다. 이에 대책위는 1.13 회사정문 앞에서 규탄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30까지 전사업장의 유해부서 인정 등을 요구하며 수차례의 투쟁을 전개했다. 86일이 지나도록 회사측은 ‘4인직업병판정위원회’의 소집을 미루고 있었으며, 유가족들은 고인의 시신이 심하게 부패한 것을 발견하고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3.31 노동조합 광장에서 영결식을 하기 위해 회사 정문앞에 도착했으나 경찰병력이 동원되어 장례식은 무산되었다. 이에 장례위는 김씨의 장례식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 평화적인 장례를 보장할 것, ▲ 직업병을 인정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투쟁 과정에서 90년 특수검진결과 13명의 직업병소견자들이 회사측으로부터 작업전환조치를 받지 않고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4.12 김장수씨의 직업병 증세에 대한 사표 강요, 4.24 박수일씨 직업병 증세로 병원 후송, 4.25에는 권경령씨가 90년 5월 직업병 판정을 받고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4.11 방안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박수일, 권경룡, 김장수씨의 직업병 참사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4월 26일 노동부는 작업환경 특별점검을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회사는 작업환경 문제가 있는 6백 데니어 인조견사 제품생산을 중단하고, 평상시 가동하지 않던 배기장치를 가동시켰다. 이에 분노한 현장조합원들은 ‘평상시 작업 환경 상태에서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라’며 작업거부를 하면서 철야투쟁에 돌입하였다. 노조는 5.3 ▲ 김봉환씨 직업병을 인정하고 유족보상하라. ▲노조가 추천하는 전문가에 의해 전, 현직 노동자 역학조사를 실시하라. ▲ 노조가 지정하는 특수건강검진의 능력이 있는 종합병원급으로 옮길 것 등 10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면파업에 돌입하였다. 그 날 국회노동위원회는 원진직업병 진상조사를 나왔다. 국회는 김봉환씨는 1월 5일 이미 사망했지만, 재직당시 직업력, 임상조건 등을 고려할 때 직업병의 개연성이 있다는 ‘원진직업병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노동부, 회사, 장례위는 김봉환씨 사망과 관련 보상뿐 만 아니라 직업병 관련제도 개선, 작업환경 측정 및 점검, 차후 발생되는 문제해결에 관한 사항 등 모두 21개 항목에 합의하였다. 김봉환씨는 눈 내리는 한 겨울,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염도 못한 시신으로 누워 있다가 1백37일만의 장례라는 유례없는 진기록을 남겼다. 5.3 파업에 들어갔던 노동조합은 5.27부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김봉환씨의 사망을 계기로 한 인정투쟁은 정부의 직업병 은폐를 거부하고 산재추방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연대활동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 등 직접행동으로 나섰다. 이 투쟁의 성과로 정부의 산업재해, 직업병 예방대책이 수립되었고 원진 직업병 인정범위가 확대되었으며, 원진 전, 현직 노동자에 대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었다. 역학조사는 은폐되어 있던 직업병 환자를 새롭게 발견해서 결국 또다시 92년 인정기준개정투쟁을 거쳐 정부의 인정기준이 개정되기에 이르렀다. (직업병대책과 고용보장쟁취를 위한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 ??얼룩진 원진레이온 이력서', 1994, 86~90쪽)


사건사전번호 : H-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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