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인만행 시민규탄대회 및 추도식

제목(Title) :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인만행 시민규탄대회 및 추도식


Subject :


사건발생일 : 19921028


사건종료일 : 19921117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92.10.28 윤금이씨 살해 / 1992.11.7 시민규탄대회 / 1992.11.17 추도식

<사건내용>
주한미군병사에 의해 변태적으로 난행당해 잔인하게 살해된 윤금이씨(26) 사건과 관련,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미 제2사단 소속 케니스 마클 일병(20)에 대해 우리나라 사법당국이 재판권 행사에 나섰다. 의정부경찰서는 6일 오후 평택 미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마클 일병을 미군범죄수사단으로부터 넘겨받아 사건당일 행적 등을 집중 추궁했다. 윤씨는 1992.10.28일 자신의 셋방에서 이마를 둔기로 맞고 체내에 콜라병, 우산대가 박힌 채 살해됐으며, 마클 일병은 31일 피묻은 바지를 입고 귀대하다 검거돼 미군측에 넘겨졌다. (조선일보 1992.11.7)
주한미군병사에 의해 변태적으로 난행당해 잔인하게 살해된 윤금이씨(26) 사건과 관련, 동두천민주시민회와 대학생회 등 13개 단체가 대책위원회를 구성, 공동대응에 나섰다. 대책위는 이 사건의 용의자가 한국경찰의 기초수사도 없이 미군 수사당국에 넘겨진 것에 항의 △ 한국 법에 의한 사건의 처리 △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 △ 미군범죄에 대한 수사권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의 요구사항을 내세우며 4일부터 가두에서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오는 7일에는 미2사단 정문앞에서 대규모 시민규탄대회를 열 예정이다. (조선일보 1992.11.6)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일병의 윤금이씨 살인만행 시민규탄대회가 1992.11.7 오후 4시 경기도 동두천시 미2사단 포병여단 정문앞에서 재야인사와 동두천시 민주시민회 등 49개 단체 8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조선일보 1992.11.8)
경찰측은 11월 7일의 규탄대회가 신고되지 않은 불법집회이므로 집회 장소를 원천봉쇄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자세는 오히려 동두천 시민들과 대책위원들을 더욱 분노케 하였다. 7일에 있었던 규탄집회는 동두천에서 이제껏 있어왔던 반미집회 중 최대의 규모로 치러졌다. 시민들은 무려 4차례에 걸쳐 경찰의 저지선을 뚫어냈으며 미 2사단 정문 앞 사거리를 2천여명의 시민들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교정, <다시 태어난 동두천>, ??월간 말', 1993년, 1월호, 240쪽)
-->위 인용한 두 자료의 참석 규모 차이(800여명 대 2천여명) : 연구팀

1992.11.17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을 6백여명이 시민들이 가득 메운 가운데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주한미군에게 죽임을 당한 윤금이씨 추도식 및 시민규탄대회’가 있었다.
영정 앞에 높여진 순백의 국화꽃송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추도식이 끝날 무렵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윤씨의 어머니 강공례씨 (51)가 쓰러지듯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금이야’ 전주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온 강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애잔한 추도의 끝은 분노로 이어졌다. 범인 케네스 마클 일병(20)을 구속하지 않은 검찰에 대한 규탄과 결의문 낭독, 탑골공원까지의 가두시위.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미리암 수녀(52 가톨릭여성사목복지위원회 소속)는 ‘이번 사건은 너무도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모군(23 D대 경영 4)은 ‘우리의 딸이 처참하게 죽어갔는데도 단지 교도소에 양변기가 없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조차 하지 않는 우리 정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냐’고 했다. 만장을 앞세운 행렬이 종로를 따라 걸을 때 인근 시민들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조선일보 1992.11.18)


사건사전번호 : H-1370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