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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승이 기억하는 4월 28일

제목(Title) : 이정승이 기억하는 4월 28일


에피소드내용 : 이른 아침부터 유난히 햇볕이 강렬했던 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됐다. 김세진과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거리시위를 시작한 지 5분 남짓이나 지났을까? 득달같이 달려온 전경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부 경찰병력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두 학생을 붙잡기 위해 건물 옥상을 뛰어올랐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그중 한 학생이 비틀거리며 다시 나타나 팔뚝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선 굶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시너를 사가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 저게 분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등 쪽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시위 직전 미리 현장에 도착해 있던 이정승은 자기도 모르는 새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나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분신 이후 찰나의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연좌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끌어내던 경찰들도 멍한 채였다. 3~4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울며, 매를 맞으며 학생들은 그렇게 구호를 외치다 천천히 ‘닭장차’에 태워졌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구속된 이정승은 석 달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 판교 김세진의 무덤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전신에 60%와 80%의 3도 화상을 입은 김세진과 이재호는 그해 5월3일과 5월26일 각각 세상을 등진 뒤였다.


제보자 : 이정승


관련일시 : 1986-04-28


에피소드사전번호 : E-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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