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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불교운동연합

제목(Title) : 민중불교운동연합 : 민불련


Subject :


결성일 : 1985-05-04


단체성격 : 공개 / 합법


주요인물 : 여익구(민불련 의장), 고은


결성과정 : 80년대의 일반 사회가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시작됐다면, 불교계의 80년대는 ‘10?27법난’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제6대 중앙종회를 구성해 출범한 화합종단은 나름대로 종단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 세력은 “분규만을 일삼는 조계종단은 더 이상 자체 정화의 능력이 없으므로 부득이 타력으로나마 정화하지 않을 수 없다.”며 조계종단의 주요 간부들을 강제로 연행?고문했다.
당시 총무원장이던 월주스님은 강제로 사퇴했으며, 18명의 스님이 구속되고, 32명의 스님들은 강제로 승적을 박탈당했다. 자주적인 종단 발전을 도모하던 조계종의 노력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10?27법난은 당시 불교계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청년 학생불자들은 냉엄하게 분석하기 시작했고,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곱씹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청년불자들은 사찰이 불교운동의 기본적 토양임을 재인식하고, 81년 가을 무렵부터 ‘여래사(如來使) 운동’(혹은 寺院化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운동 주체들은 기관지 《청년여래》 창간호(81년 가을 창간) 서문에서 “불교가 중생교화의 본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사회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생을 인식해야 한다. 하화중생의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과 그 실제 적용을 위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엮어 명실공히 젊은 불자들의 전열을 정비하여야 한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을 여래사라 하며 여래사들의 재도전을 여래사 운동이라 한다.”고 밝히며 민중불교운동의 단초를 열기 시작했다. 이들의 운동은 그러나 82년 초 중단된다. 여래사 운동의 중심인물인 법우 스님, 최연, 신상진 등이 구속되고, 많은 스님과 학생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고초를 받고,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즈음 젊은 스님들이 주축이 된 제1회 ‘청년승가육화대회’가 81년 7월 열렸고, 이런 노력들이 합해져 승가와 재가의 조직체인 ‘청년불교도연합’이 결성된다. 청년불교도연합은 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법회’를 열고, 불교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대학생불교연합회도 70년대부터 연례행사로 해왔던 ‘화랑대회’의 성격과 명칭을 82년 여름부터 ‘한국불교 1,600년 대회’로 바꾸고,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70년대 말에 제기된 ‘민중불교론’을 확산?발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84년 봄부터 학원과 공장의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됐으며, 85년 ??2?12 총선??이 야당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사회 전체 분위기는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불교계도 이때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비상종단(83. 9. 15~84. 8. 1) 당시 만들어졌던 불교사회문화연구소와 청년승가회 인사들이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84년 11월 이후 불교의 민중화를 위한 조직건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고, 이들은 85년 5월 4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한글회관에서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을 창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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