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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학생연맹

제목(Title) : 전국민주학생연맹 : 민학련, 전민학련


Subject :


결성일 : 1981-02-00


해산일 : 1981-06-00


단체성격 : 비공개 / 비합법


주요활동지역 : 서울


주요인물 : 이선근(李善根, 서울대), 박문식(서울대), 이덕희(서울대대학원), 홍영희(이대졸), 윤성구(서울대, 경인지부장), 이호철(부산지부장), 박순섭(남부지회장), 최경환(성대, 중앙지회장), 손형민(연대, 서부지회), 김창기(외대, 동부지회), 동인규(수원지회), 김진철(서울대), 이종구(동대), 민병두(성대), 송영인(서울대)


조직체계 : 경인지부-남부지회, 중앙지회, 서부지회, 동부지회, 수원지회, 부산지부


결성과정 : <민학련>은 1980년 가을의 이른바 ‘무학(무림-학림)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해나갔다. 무학논쟁이란 1980년 하반기부터 1981년까지 서울대 학생운동 내부에서 80년 상반기 투쟁을 주도했던 무림그룹과 이에 비판을 가하며 등장했던 그룹(학림 또는 민학련)사이에 학생운동의 투쟁방침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1980년 5월 15일 이른바 ‘서울역회군’의 원인?결과?책임문제에서 발단이 되었으나 이미 1980년 봄 투쟁 과정에서부터 논쟁의 뿌리는 드러나고 있었다. 1980년 5월 투쟁 패배의 원인에 대한 당시 학내 지도부였던 무림의 입장은 통일적 지도부와 대중기반의 부재에 있다고 보고, 앞으로 학생운동은 과도한 투쟁을 지양하고 기층대중에 대한 선전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림은 이러한 주장을 조직보존론 혹은 준비론, 결과적으로 패배주의라고 비판하면서 학생운동의 대중조직역량의 강화는 선도적인 투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운동가 자신도 투쟁을 통해 단련되어짐으로써 진정한 대중의 전위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와중에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 공개유인물살포사건(반제반파쇼 학우투쟁선언)을 계기로 무림사건이 터져 이들 다수의 주력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강제 징집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더 이상 협의체 수준의 조직으로는 학생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수 없다는 학림측의 판단에 따라 1981년 2월 이선근 등 5명의 발기인 및 중앙위원으로 중심으로 <민학련>을 결성하게 되었다(민가협?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pp.37-39, 42-43). 즉 광주학생을 겪고 난 뒤, <민노련>의 이태복은 이선근과 박성현으로부터 학내상황을 자세히 듣고난 뒤 반독재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할 중심조직이면서 노동자조직과 연대할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는 이미 <민노련>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결의가 필요했으나, 보안문제 때문에 학생조직 문제를 양승조와 김병구?신철영 등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선근을 접촉선으로 하고 진행된 학생조직 건설작업은 시내 각 대학의 아카데미와 야학팀에 열성적인 인물을 선발해서 하기로 하고, 그 활동내용을 보고 받고 현장이전팀을 인계받아 공장에 분산배치해나갔다.

<민학련>은 지방조직의 확대에도 노력을 기울여 부산의 이호철을 핵으로 하는 부산지역조직을 건설했고 전남대 박관현의 후배였던 신영일과 접촉하고 있었다. <민학련>조직이 단기간에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는 운동노선이 현장지향적인 학생운동의 핵심 활동가들을 <민노련>이라는 현장조직이 조직적 연대하에서 밑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준비를 위해 투쟁을 기피하는 노선이 설득력을 상실한데 있었다. 그리고 조직내부적으로는 무림지도부였던 박성현이 이전 시기 운동을 반성한 뒤 <민학련>노선을 실천했고, 박문식이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민학련>의 조직원칙과 체계는 <민노련>의 조직방식과 유사했다. 다른 점은 학생운동가들의 정치의식과 사상적 수준이 높다는 점을 감안해 기간조직을 하향식으로 편재했다는 것이었다(이태복, ?내가 겪는 사건: 노동운동 투신 동기와 민노련?민학련 사건?, ??역사비평?? 1994 여름, 계간25호, pp.27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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