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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학원민주화 운동

제목(Title) : 1980년 학원민주화 운동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00122


사건종료일 : 19801211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0.1.22 : 연세대, 1974년 긴급조치 1호와 4호,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후 학원민주화와 학내 시위와 관련해 제적된 학생 56명 전원을 복학시키기로 결정(동아일보 1980.1.23)
1980.1.23 : 고려대, 긴급조치위반혐의로 제적된 학생 84명, 서울대, 학칙개정후 296명, 서강대 27명, 이화여대 14명, 경북대 34명 등 복학결정(동아일보 1980.1.23; 황의봉, {80년대의 학생운동', 예조각, 1985. p.272)
1980.2.12 :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 대표들 학원민주화 결의
1980.2.24 : 서강대 <학생회부활추진위> 결의문 발표
1980.3.28 : 서울대, 학생회 6년만에 부활, 회장에 심재철(沈在哲, 사범대 영어과 4년). 명지대생 1백여명 이사장실 점거?철야농성(29일까지, 동아일보 1980.3.29, 1980.4.7). 중앙대 약대생 1백여명 ‘폭력교수’의 공개사과 요구하며 농성(29일까지). 동덕여대 4백여명 조용방(趙容郁)학장 등 3명의 사퇴요구 농성(황의봉, pp.272-273; 동아일보 1980.3.31). 한신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결성(한신학보 축쇄판 1권, p.15). 동덕여대, 학장퇴진요구 농성. 중앙대, 학원민주화 시위
1980.4.1 : 경희대(~5.6)?인천대 등 전국 14개 대학 어용교수퇴진?학원자율화 등을 요구하며 시위 농성(황의봉, p273; 동아일보 1980.4.2)
1980.4.2 : 홍익대 <학생회부활추진위> 주도 4백여명, 총학생회장 직선을 요구하며 농성. 경기대생, 1백여명 학장과 어용교수, 재단이사진 사퇴 요구 시위(동아일보 1980.4.2) 한국체대(동아일보 1980.4.3)?서일공전, 학원민주화시위. 高柄翊 서울대총장 학생회 공식 인정(동아일보 1980.4.3)
1980.4.3 : 세종대(~5.3), 재단과 학원의 분리 어용교수퇴진 등을 요구하며 농성(황의봉, p273; 동아일보 1980.4.4, 5.3). 홍익대 이사진 퇴진 요구 농성(동아일보 1980.4.4). 경기대 학원민주화 시위
1980.4.7 : 농성중인 경희대생 5백여명, [趙永植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경희인의 백서] 배포. 유도대생 3백여명, 학원민주화 요구 시위(동아일보 1980.4.7)
1980.4.9 : 국제대?홍익대 학원민주화 시위. 한양대, 농성학생 폭행사건 발생
1980.4.10 : 한양대생 1천 5백여명 오전 10시 본관 앞에 모여 9일 오전 농성학생 폭행사건에 깡패들을 난입시켰다고 주장, 김연준총장의 해명을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 연좌농성(황의봉, p273; 동아일보 1980.4.10). 중앙대생 총장사퇴와 재단과 학교운영의 실질적 분리 등을 담은 [4.10선언문] 배포(동아일보 1980.4.10)
1980.4.11 : 서울대, 4월혁명 기념제 및 故김상진 장례식을 5년만에 거행(황의봉, p273; 동아일보 1980.4.10, 4.11). 서울지역 9개 대학 대표, 학원사태에 대한 공동성명 발표.
1980.4.13 : 성균관대, 군사교육반대 유인물 배포.
1980.4.14 : 최규하대통령 특별담화발표, 학원분쟁 확대기운에 유감의 뜻을 표하고 학생들에게 자제를 요구(황의봉, p273)
1980.4.15 : 서울대생 2천여명, 대통령특별담화에 대해 항의집회(황의봉, p273)
1980.4.16 : 서울대생 2천여명, 총학생회 주최로 [현시국에 대한 토론과 성토]라는 주제로 학생총회를 열고 토론회를 가진 뒤 계엄즉각해제?언론자유보장?구속중인 양심범 석방 등의 결의문 채택(황의봉, p273; 동아일보 1980.4.16). 세종대생, 학원정상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동아일보 1980.4.16).
1980.4.19 : 서강대생 150여명, 병영집체훈련 전면폐지를 요구하며 농성(~5.1, 동아일보 1980.5.1)
1980.4.22 : 숭전대, 총장사퇴 농성. 16일째 철야농성중인 한양대생, <학원민주화를 위한 학생협의체>구성(동아일보 1980.4.23)
1980.4.23 : 서울농대, 어용교수 퇴진 농성
1980.4.24 : 재경 종합대 교수들 361명 [최근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 발표, 대학의 민주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황의봉, p.274; 동아일보 1980.4.24). 서울농대생 5백여명 어용교수퇴진 농성(동아일보 1980.4.24). 서울대 총대위원회, 병영집체훈련거부 결의. 성균관대?서강대 1년생들, 집체훈련거부 농성(동아일보 1980.4.25). 항공대, 학원민주화요구 농성
1980.4.28 : 서울 농대생 3백여명 어용교수퇴진을 요구하며 본관건물을 점거, 농성 돌입. 서울대학생운영위, 병영집체훈련 무기한 연기 결의(~5.1. 동아일보 1980.4.29). 국민대 학원민주화 농성
1980.4.29 : 건국대생 20여명, 이사진 전원사퇴 요구하며 농성(동아일보 1980.5.2)
1980.4.30 : 고려대 서클연합회, 시국선언문 발표
1980.5.1 : 성균관대생 1천 5백여명, 집체훈련영장철회와 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 투석전으로 기동경찰 3백여명의 최루탄 발사에 맞섬. 10.26이후 학원사태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한 첫 사례. / 서울대 긴급조치위반 복교생 3백여명, 낮 12시 30분 도서관앞 광장에서 재학생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비상계엄 즉각해제, 2원집정부제 구상철회 등을 결의, 대회후 1천 5백여명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까지 행진, 기동경찰과 30분간 대치(황의봉, p274; 동아일보 1980.5.1)
1980.5.2 : 서울대생 1만여명 정오경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화대총회 개최, 계엄해제 등을 요구. 철야농성하면서 ‘시국성토를 위한 서울대인의 밤’ 행사 진행. 서울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병영집체훈련 응하기로 결정(동아일보 1980.5.2, 5.3) / 고려대생 1천여명 오후 8시 반경 서관 뒤편 농구장에서 계엄철폐 정부개헌주도반대 유신잔당퇴진 정치일정단축 보장 등 구호를 내걸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뒤 스크럼을 짜고 교문앞까지 진출, 경찰과 충돌. 석탑축전포기하고 5일까지 ‘민주화1차대행진’을 벌임 / 성균관대 1천8백여명 정오부터 계엄해제 징병검사통지서철폐 등을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투석전 전개(황의봉, pp.274-275; 동아일보 1980.5.2)
1980.5.3 : 서울대, 비상계엄해제 등 요구시위
1980.5.4 : 서울대 1년생 문무대 입소, 제3차 민주화대총회(동아일보 1980.5.5)
1980.5.6 : 숭전대생 7백여명,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채택. 외국어대생 2천여명, 민주화촉진대회. 이화여대 총학생회, 5월 한달을 ‘이화민주투쟁의 달’로 결정. 연세대 총학생회, 비상계엄해제 요구하는 비상학생총회 개최(동아일보 1980.5.6). 동국대생 7백여명, ‘민주화를 위한 학원대회 개최’. 한신대, 시국선언문 발표 및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농성돌입(동아일보 1980.5.7). 학원민주화 등 요구하며 대학연합 가두시위
1980.5.7 : 연세대, 시국성토대회. 한신대 대학원생,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선언]발표. 연세대 대학원생, [민주화운동에 즈음한 우리의 결의]발표. 홍익대 1천여명 ‘범민주화 촉진대회’ 개최(동아일보 1980.5.7). 외국어대생 8백여명 야간 가두시위(동아일보 1980.5.8)
1980.5.8 : 중앙대 총학생회, [5.8선언문]발표. 이화여대, 국민대, 숙명여대, 홍익대, 동국대, 인하대 등 비상계엄해제, 노동3권들을 요구하며 교내시위(동아일보 1980.5.8, 5.9). 서울지역 대학신문들, [시국에 대한 대학신문 결의]채택.
1980.5.9 : 연세대, [연세대학교 민주화투쟁선언문] 발표. 서울대 학부?대학원생, 계엄해제요구 철야농성. 이화여대, 연좌시위. 숙명여대?한양대, 횃불시위. 건국대?인하대 시국성토대회
1980.5.10 :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비상계엄해제, 노동3권보장 등 10개항의 결의문 채택(동아일보 1980.5.10). 단국대 시국성토대회
1980.5.13 : 서울지역 대학생 계엄철폐 가두 시위(동아일보 1980.5.14)
1980.5.14 :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 결의(동아일보 1980.5.14)
1980.5.15 : 전국 대학생 계엄해제 요구 가두시위, 35개대 7만여명 서울역 집결 및 해산
1980.5.16 : 서울대 등 27개 대학총학생회장단 ‘일단 교내 및 가두시위 중단, 정상수업’ 결의(동아일보 19805.16). 서울농대 등 수원지역 6개대학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수원역과장에서 시위(동아일보 1980.5.17)
1980.5.17 :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연행
1980.7.30 : 연세대, 학생징계처분
1980.8.4 : 고려대, 반정부시위 가담 학생 27명 제적
1980.8.9 : 성균관대, 시국관련 교수 4명?학생 11명 제적
1980.8.20 : 한신대, 학내시위관련 학생 7명 제적
1980.8.31 : 각 대학, 시위관련 학생들 제적
1980.9.9 : 경희대, 반파쇼 유인물 살포 및 교내시위
1980.10.17 : 고려대, [반파쇼민주화의 횃불을 들라] 선언문 배포. 서울대, [민주화학우선언]유인물 배포 및 시위
1980.10.21 : 경기공전, 교내 반정부 유인물 배포
1980.10.23 : 서울시립대, 반정부 시위
1980.11.4 : 경희대 반정부유인물 배포사건
1980.12.11 : 서울대, [반파쇼학우 투쟁선언문] 사건(일명 무림사건, 동아일보 1980.12.13)

<사건배경>
1979년 10.26사건 이후 한국사회는 그동안 유신의 억압 속에서 짓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었다. 학생운동 역시 1980년 1월 22일부터 70년대 ‘긴급조치’로 제적된 대학생들이 복적되고 1학기 개강을 맞아 각급 단위의 학생회선거가 5년만에 부활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각 대학 학생들은 ‘학원자율화’ 또는 ‘학원민주화’를 위해 그동안 학원내 권위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재단과 학교운영의 분리’, ‘총장 및 어용교수퇴진’ 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홍익대, 건국대 총장 등이 자진사퇴하기도 했지만, 경희대, 세종대 등은 학생들의 장기간 점거농성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1학기 개강과 더불어 기존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회와 대의원회 등 자치기구와 학내서클의 활성화를 통해 학원자율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요구가 학내문제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10.26사태 이후 개헌논의가 구체제?수구세력들에 의해 비민주?반민주적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경제난국과 노사문제는 일부 매판자본과 권력의 야합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며 재벌과 권력의 비리를 집중성토(동아일보 1980.4.16)”했다. 학생들의 과거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요구는 서울대, 성균관대, 서강대를 중심으로 1980년 4월말 '병영집체훈련거부'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정부당국은 징집영장발부로 강력히 대응하기도 했는데, 5월 2일, 이들 학교 학생들은 "국민들의 안보의식 결여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단 집체훈련에 응하기로 했다. 5월이 되자 학생들의 민주화요구는 더욱 거세게 제기되었다.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외국어대를 비롯한 서울 및 전국 각 대학교에서는 '비상계엄해제', '2원집정부제 구상철회', '과도기간단축', '유산잔재청산'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대행진', 민주화투쟁의 달', '민주화실천주간'을 정해 더욱 조직화된 시위가 전개되었다. 5월 10일 서울과 지방의 23개 대학 총학생회장은 "우리들은 당분간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내시위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노동3권보장", "농협의 민주화와 농민권익의 보장” 등 10개항의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13일을 기점으로 대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은 서울시내로 진출하는 가두시위로 이어졌고, 15일 서울역에 35개대 7만여명(동아일보 1980.5.16)이 모임으로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은 “비상계엄해제”, “언론자유보장” 등 10여가지의 구호를 외쳤다. 한편 이들 사이에서는 "①경찰과의 충돌을 불사, 중앙청 쪽으로 들어가자 ②일단 여의도 광장으로 가자 ③서울역앞에 계속 남아 시위하자 등 의견이 맞서"기도 했다. 오후 7시경 20여명의 각 대학총학생회연석회의가 열려 “연좌데모는 8시 반에 모두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다(동아일보 1980.5.16)”는 방침이 세워지는, 이른바 ‘서울역회군’이 이루어진다. 다음날 전국 55개 대학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3일간 진행된 가두시위에 대한 평가 및 현시국과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 진행하던 중 17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확대조치가 내려지고, 이들은 계엄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계엄조치 중 하나로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민주인사 및 학생운동 활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점거 및 수배가 떨어졌다. 이로써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렸던 1980년 5월의 민주화투쟁은 위기의식을 느낀 과도정권과 신군부에 의해 다시 무산되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세력은 이에 대응하여 유인물 배포 등을 비롯한 대정부 투쟁을 신속하게 전개했지만, 5.17계엄확대 조치이후 반전된 정세와 장기휴업이라는 조건속에서 투쟁이 효과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9월 1일 개강과 함께 9월 9일, 경희대에서의 반파쇼 유인물 살포 및 교내시위를 시발로 10월에는 한신대?고려대?동국대?서울산업대?연세대 등의 교내시위로 이어졌고, 이후에도 간헐적인 시위투쟁이 계속되었다. ‘서울의 봄’ 이후 80년도에 발생한 학생운동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무림사건’이었다. 이른바 ‘무림그룹’은 1980년 5월 투쟁의 좌절이 통일적 지도부와 굳건한 대중기반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의 전위는 아니지만, 그 형성의 주요한 모체이므로 소모적인 시위만능주의를 배격하고 기층민중운동으로의 이전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12월 11일 12시 경, 서울대생들이 학생식당과 도서관 앞에서 [반파쇼학우 투쟁 선언문]을 살포하면서 교내시위를 전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날의 시위와 관련하여 1차로 9명이 구속되었으며, 이후 계속된 수사는 지하 이념서클의 핵심멤버들을 대거 포괄하게 되었는데, 8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어 장기간 수사를 받았고, 다수가 강제입대를 당했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사상이론과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형성사, 1988, pp.18-25).

<사건내용>
10.26사태 이후 80년도 학원민주화운동은 크게 ‘학내 민주화 및 자율화’, 그리고 정치적 의제로 ‘비상계엄해제’와 ‘정치민주화’의 요구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당국의 태도는 표면적으로는 “학원문제는 학원의 자율화에 맡긴다”는 것이었으나, 학생들의 요구 중 하나였던 ‘학생회부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동아일보 1980.3.29). 또한 4월 30일, 1979년 12월 이후 4개월만에 열렸던 긴급 계엄사전군지휘관회의를 통해 계엄사는 당시 학원민주화운동을 “학원을 일 개인의 정치선전장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엄단할 것으로 결의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80.5.2). 이어 5월 17일 ‘전국계엄확대조치’하에서 신군부의 광주항쟁무력진압과 학생운동활동가를 비롯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체포 및 수배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1980년도 학원민주화운동은 일시적인 침체기를 맞게 된다.


사건사전번호 : H-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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