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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노조 탄압 및 노조사수투쟁

제목(Title) : 원풍모방노조 탄압 및 노조사수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00716


사건종료일 : 19821001


사건내용 : <사건경과>
-80.07.16,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방용석 지부장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출두요구 및 수배
-08.21, 1차 노동조합 정화조치
-09.20, 2차 노동조합 정화조치
-10.31, 방용석 지부장?박순희 부지부장 해고
-12.08, 합동수사본부, 부지부장 한상분?이문희, 총무부장 임재수 연행,
상무집행위원 19명 및 대의원 30여명 연행
-81.02.08, 노조, 신 노조집행부 구성 및 대의원대회 결과 신고
-05.30, 타이어와 통합 대의원대회 개최 및 공동위원장 선출
-82.09.27~28, 회사, 노조 사무실 무단 진입 및 노조 간부 폭행
, 노조원 농성돌입
, 도산(都産)추방 구사궐기대회
-09.30, 폭력배?경찰, 농성장 1차 강제진압
노동자 가두시위
-10.01, 경찰, 농성장 2차 강제진압
-10.07, 경찰, 기도회(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관) 원천봉쇄
노동자?학생 등 가두투쟁(영등포 일대)
-10.13, 노조, 항의 및 규탄 시위(원풍모방 공장 입구, 대림성모병원 부근)
-11.16, 경찰, 수배 노조간부 3명 구속

<사건배경>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로 집권의 정치적 계기를 확보한 군사독재정권은 8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면 노동운동에 대한 신속하고 전면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것은 70년대 이래 가장 전투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싹을 잘라버림과 동시에 10?26이후 80년 서울의 봄 시기까지 분출되어오던 노동자들의 불만을 일거에 잠재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에 따라, 80년 8월21일의 ‘노동조합 정화지침’은 한국노총 산별위원장 12인의 강제해직과 160여개 지부를 모두 해산시켰다 (2차 정화조치는 9월20일).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이러한 노조간부들의 인적제거뿐 아니라 법적, 제도적 조치와 병행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산별노조체계는 기업별노조체계로 대체되었고, 노동관계법을 개악하여 노조 자체의 결성과 활동을 실질적으로 불가능케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더불어, 민주노조들이 강제해산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전면적 탄압 및 와해의 도마 위에 올랐던 민주노조들과 그에 대한 강제해산조치의 시기는, 청계피복(81년 1월), 반도상사(81년 3월), 남화(81년 6월), 콘트롤데이타(82년 7월), 무궁화메리야스(82년 9월) 등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강제해산의 타겟이 되었던 노조가 바로 원풍모방노조였다. (이상, 전태일기념사업회 편,『한국노동운동20년의 결산과 전망』, 세계, 1990, 100~105쪽; 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42~43쪽 참조)

<사건내용>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에 소재한 섬유업체인 원풍모방의 노동조합은 청계피복노조 등과 함께 70년대 이래의 가장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민주노조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원풍모방 노조는 자연스럽게 정부의 강제해산노조 리스트에 올랐고 회사측 또한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정부의 노조와해책에 적극 동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부와 회사의 원풍모방노조에 대한 반노조연합전술은 80년 7월16일 당시 노조 지부장인 방용석에 대한 탄압으로부터 개시되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내란음모 조작사건에 그를 연루시켜 출두명령을 내리고 수배조치를 하였는데, 상급노조인 한국노총 섬유노동조합 또한 노동계 정화 차원으로 그와 함께 부지부장인 박순희에 대한 조합원 제명조치를 내렸다. 이에 대한 원풍모방 노조의 항의와 저항은 어느 곳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던 와중인 같은 해 12월 8일에 또 다시 노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합동수사본부는 노조 지부장 직무대리 이문희 부지부장, 상근자 한상분 부지부장, 임재수 총무부장을 연행하여 폭력과 고문을 행사했고, 상무집행위원 19명 전원과 대의원 30여명을 연행하여 강제사표를 받고 해고조치했다. 한편, 회사는 노조활동에 적극적인 조합원 명단을 작성하였으며 계엄사 수사관들은 작업복을 착용하고 현장과 노조사무실을 오가며 불안과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연행자중 4명은 서대문 구치소를 거쳐 원주에 있는 38사단에서 순화교육을 받았는데, 그중 1명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46~47쪽) 그러나, 이러한 탄압이 노조원들의 노조사수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1981년 2월8일 조합원들은 새로운 집행부의 구성과 대의원대회 개최 후 그 결과에 대해 서울시에 신고하며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울시와 노동부는 개악된 노동조합법을 근거로 부산의 타이어공장노조와의 통합을 명령하며 신고서를 반려했다. 이에 따라, 노조원들은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후 불가피하게 타이어측과 통합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원풍측의 이무술과 타이어측의 정대원을 공동위원장으로 선출하게 된다.
이후 노조활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던 1982년 9월27일 드디어 전면적인 노조와해작전이 개시되었다. 그것은 경찰과 회사측의 사전협조 각본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1982년 9월27일 현장 남성관리자들(현장 담임급들) 중심으로 구성된 40여명의 회사원들(양병욱, 김준호, 김덕수, 위동련, 박명서, 여자반장 강정순)이 노조사무실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노조간부와 조합원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내는 등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고, 사무실 기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사주에 따라 같은 회사원들이 폭력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회사는 노-노 갈등을 유발시키는 형태로 노조를 와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총무부장 이옥순과 조합원 박혜숙이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노조사무실 점거에 성공한 후 그들은 위원장 정선순에게 집중적인 폭행과 협박을 가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민간테러였다. 정선순은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린 채로 있어야 했으며, 괴한들은 정선순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정선순이 구타에 못이겨 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고 정신이 돌아오면 다시 구타했다. 그러나, 정선순이 17시간에 걸친 그들의 폭행과 협박에 굴하지도 사표를 쓰지 않고 버티자, 그들은 정선순을 승용차에 실어 화곡동 부근 아파트에 버리고 사라졌다. 이 전체과정에서 간과하지 못할 대목은 정선순에 대한 폭행과 협박과정인데, 다음의 대화내용은 이사건이 회사의 단순한 사주에 의한 것만은 아니며, 당시 현장 남성(여성도 포함하여) 관리급 노동자들의 노조 및 ‘여성’ 노조위원장에 대한 인식의 단면 또한 보여주는 것이기에 길게 인용한다.

양병욱: 이 쌍년아 사표를 써. 가랭이를 찢어 죽이기 전에 빨리 사표를 쓰란 말야, 이년아!
조합장(정선순): 사표를 요구하는 이유를 밝혀라
김준호: 담임 전체회의에서 회사 대표자가 도산 앞잡이인 너와는 교섭을 할 수 없다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김덕수: 회사측에서 우리하고는 대화도 하고 회사를 정상가동시키겠다는데, 당연히 우리가 노조집행부를 맡아야 되는 것 아니냐.
위동련: 무슨 말이 많아 이년아. 너 같은 년은 개값도 안돼. 이년아 (턱을 툭툭 치며) 왜 사표를 안 써 이년아!
문계순: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지금껏 네가 잘한 것이 뭐야? 이년아!
강정순: 지금까지 6개월 동안 조합장을 해먹으면서 단체협약과 임금인상문제도 해결 못했으니 이제 조합장을 나한테 인계해라. 사표만 쓰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강오대: 조합장을 해먹으려면 사리판단을 잘 해야지. 이제 고이 사표내고 물러가거라 응.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야.
유천종: 우리가 이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생각을 해서 한 것이니 네가 사표내는 것이 남자들의 생존을 보호하는 길이다.
양병욱: 조합장을 나한테 인계해라. 6개월 동안 지켜보았는데, 희생만 늘었으니 너 한테 한계가 온 것 같다.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가거라. 제발 사표 좀 써라.
박태: 조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물러나야 될 것 같다.
서순교: 기관에서 도산에 가는 것을 왜 싫어하는지 너는 아는가? 이쪽 저쪽 다 생각을 하고 왔으니, 네가 사표 쓰는 것만 남았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요, 영웅이 되는 길이다.
양병욱: 야! 이년아, 현 집행부가 계속 끌고갈 가치가 하나도 없어. 이 쌍년아, 노조가 네꺼냐, 내놔라, 내놔. 빨리 사표써.
조합장: 사표는 쓸 수 없다. 사표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빠를 것이다.
문계순: 네가 죽기를 원하는데, 너 안 죽여. 사표내는 것을 원하는 거야. 이런 씹어먹고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아.
조합장: 내가 왜 너희들에게 사표를 내. 사표를 내더라도 나를 선출한 조합원들에게 내야지.
양병욱: 우리는 조합원이 아니냐, 이 쌍년아. 지금 대의원들이 대의원이냐? 로봇지. 그래서 못 믿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나선거야. 이러기 위해서 6개월 동안 반조직활동을 해왔다, 왜? 이년아
김덕수: (비아냥거리며) 조합장님이 시멘트바닥에 앉으시면 되나요. 방석에 앉아 고집 그만 부리시고 조합원들을 살리기 위하여 사표를 내시지요. (이상,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엮음,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활동과 투쟁 』, 풀빛, 1987, 280~284쪽 참조)

한편, 노조사무실 점거와 노조간부 폭행에 대한 소식은 급속도로 현장에 퍼져나갔고 650여조합원들의 분노는 곧바로 농성투쟁으로 이어졌다. 조합원들은 주간작업-야간농성의 양면전술을 사용하며 농성을 지속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식당을 봉쇄하고 수돗물을 끊으며 농성의 장기화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와 동시에 당시 한 신문보도에 따르면, 회사측은 27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생산직 노동자 2백여명을 공장마당에 결집시켜 ‘도산추방 구사 궐기대회’를 가졌으며, 대회 참석자들은 “일부 어리석은 종업원들이 외세의 사주를 받고 회사에 무조건 반항하고 회사규칙에 불응하는 것만이 마치 근로자의 자세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고 하며 도시산업선교회와 그 계열 노조원들을 성토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82년 9월 29일자).
9월 29일부터는 회사의 농성해제 수법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고향집에 거짓 전보를 치는가 하면, 부친사망, 모친위독 등의 사내방송을 틀고 농성장에 강한 스팀을 틀어 농성조합원들이 고온에 지쳐 쓰러지게 하기도 했다. 9월30일에서 10월1일 양일간에 걸친 최종적 강제해산과정은 경찰의 물리력과 회사가 고용한 폭력배들의 합동작전이었다. 9월30일 오후 6시경 폭력배들이 농성현장에 들이닥쳐 250여 조합원들을 밖으로 끌어낸후 10시30분경에는 전경 150여명이 합세하여 나머지 조합원들에게 폭행을 가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11시20분경 나머지 조합원들은 가두시위로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추석날인 10월1일 새벽4시에서 4시50분에 걸쳐 정문 안쪽에서 서로 어깨를 낀 채 연좌농성을 하던 마지막 농성자들까지도 전투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폭력적인 진압과정은 36명의 연행자와 72명의 부상자(->원풍모방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민주노조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활동과 투쟁', 풀빛, 1988의 경우 80여명의 조합원들이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기록: 연구팀)로 나타났다. 이후 10월7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관에서 개최 예정되었던 기도회조차 경찰의 원천봉쇄조치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항의하여 영등포 일대에서 노동자-학생들의 연대가두투쟁이 조직되기도 했으나 정부와 회사의 노조에 대한 강제해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풍모방 노조원들의 노조사수투쟁은 결국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것은 실패한 노조사수투쟁에 대해서, 일정한 의미와 성과를 부여하려는 입장과 노조지도부의 적절한 대응의 부재 등을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으로 갈린다. 전자는, 투쟁은 그 최종결과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노동운동내에서 그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본가와 군부정권의 악랄함과 짓밟히는 노동자의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등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블랙리스트철폐운동, 해고반대투쟁 등으로 이어져 일정한 노동운동사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49쪽). 반면, 비판적 입장은, 당시 원풍노조 지도부의 사수투쟁을 일종의 ‘역량보존론’으로 규정하며 수세적인 대응기조에 초점을 두고 비판을 가한다.(민중석, 『남한노동운동사』①, 들불, 1989 , 102~103쪽)
그런데, 지금 평가의 어느 입장을 취하냐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가를 위해 고려해봐야 할 사항들로는 첫째, 당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적인 상황규정력을 돌파해냈던 노조는 거의 없었다는 점. 둘째, 그렇지만 노조를 둘러싼 상황논리가 노조의 모든 대응전술을 합리화시킬 수 없다는 점인데, 양자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만이 객관적인 평가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팀 자료) 1980년 원풍모방노조 정화사건(1980. 05 - 1980. 12.)
1. 사건개요
○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는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에 착수하였고, 노동부는 1980년 8월 21일 ‘노동조합정화지침’을 시달하여 한국노총 정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산별노조위원장 등 12명에게 부정축재, 호화생활 등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함.
○ 이후 노동조합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간부들이 정화조치의 표적이 되어,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서울통상, 고려피혁, 한일공업 등의 간부들이 노동조합 임원직을 사직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조합에서 제명되고, 이를 이유로 회사에서 해직되었음.
○ 섬유노조본부는 10월 16일 한국노총의 정화지침에 의거 원풍모방지부의 방용석 지부장과 박순희 부지부장에 대해서 조합원 제명조치를 결정하였고, 두사람은 10월 31일 회사에 의해서 각각 해고되었음.
○ 1980년 12월 계엄사합동수사본부는 원풍모방노조의 간부와 조합원 48명을 연행하여 이들 가운데 14명에게는 강제로 사표를 내도록 하고, 4명은 삼청교육대로 순화교육을 보내도록 하였음.
2. 사건의 검토
□ 시대적 상황
○ 노동청의 노동조합정화지침(1980.8.20)은 정화대상자의 기준을 정하여 해당 노동조합 간부의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한 것으로, 이는 노동조합활동에 대하여 행정관청이 부당하게 개입하여 근로자의 단결권을 침해한 것으로 사료됨.
□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항거 여부
○ 원풍모방노조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대표하는 노조로서 1980년 5월 13일 여의도 노총회관에서 열린 노동기본권확보 전국궐기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는 희생자들을 위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470여만원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음.
□ 민주헌정질서의 확립(혹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 회복?신장)에 기여 여부
○ 원풍모방노동조합 간부들의 활동은 노동3권이 엄격하게 제약된 상황에서 개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노동기본권의 회복/신장에 기여한 활동으로 평가됨.

<1980년 원풍모방노조 정화사건 관련자 명단 >



(연구팀 자료) 원풍모방노조탄압 항의시위(1982. 10. 29.)
□ 항거 대상
○ 전두환 정권의 노동기본권 침해행위
- 원풍모방노동조합 탄압사건의 경우 동작구청,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 노동부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으며 특히 10월말 이후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원풍모방 조합원들에게 사직서를 쓰도록 강요하여 노동조합을 와해시켰던 점으로 볼 때, 당시 정부는 회사측의 노동조합 파괴행위를 비호하는 데서 더 나아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판단됨.
- 이는 정부당국이 자주적인 노동조합활동을 불온시하는 시각에 사로잡혀 노동자의 단결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기에 이른 처사로 사료됨
□ 항거 행위
○ 신재근(1960. 11. 7. 생)은, 전두환 정권의 원풍모방노조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1982. 10. 29. 한국외대 시계탑 앞에서 ?전○○ 군사 팟쇼정권의 악랄성을 고발한다? 제하의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팟쇼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함. 이는 노동자의 단결권 회복?신장에 기여한 것으로 사료됨.

■ 참조사항
<원풍모방 연혁>
1953년, 한국견방주식회사 설립(대표 김재현)
1958년, 한국모방주식회사로 명칭 변경
1970년, 박용운 인수
1972년, 노조민주화투쟁
1973년, 회사부도 후, 노조 수습대책위원회 구성 및 경영
1974년 2월, 노사공동경영제도
1974년 12월, 회사공매처분으로 원풍산업㈜에서 인수(대표 이상순)
1975년 2월, 원풍산업(주) 모방공장으로 회사명칭 변경
1979년 4월, 국제그룹에 흡수(대표 양정모)
1982년 9월, 노조파괴 및 559명 집단해고
1985년 2월, 국제그룹 해체?우성산업에서 인수(대표 최주호)
1987년 2월, (주) 우성산업 모직공장으로 명칭 변경 및 청주 공장으로 이전
(이상,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엮음,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활동과 투쟁 』, 풀빛, 1987, 7쪽)


사건사전번호 : H-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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