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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쇼'반전두환 기습시위 및 유인물 배포

제목(Title) : 반파쇼'반전두환 기습시위 및 유인물 배포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1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1.03.19, 서울대 교내시위
-03.25, 서울대 교내시위
-03.31, 성균관대 교내시위
, 중앙대 교내시위
-05.07, 동국대 교내시위
-05.12, 성균관대 교내시위

<사건배경>
12?12 쿠데타와 5?17 이후 70년대 이래 민주화운동의 센터 및 보루 역할을 수행해온 대학가는 한편에서는 숨죽이며 정세를 관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도적인 민주화투쟁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특히, 학내에 상주하고 있는 경찰은 학생운동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지만, 81년의 학생운동은 대규모 교내시위 및 대학간 연대투쟁을 벌이지는 못했으나 대부분 교내시위를 통해 전열을 정비하며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의 열의를 쌓아갔다. 학생운동에 대한 정부의 강경방침은 81년 3월19일 문교부 장관 이규호(李圭浩)의 징계학생 및 해직교수의 구제방침에 대한 불가입장 천명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한국일보, 1981년 3월19일자) 당시 이러한 객관적, 주체적 상황요인이 만들어낸 학생운동이 선택한 불가피한 투쟁전술이 바로 교내기습시위와 유인물 배포투쟁이었으며 그것은 학생들의 거의 유일한 전술이다 시피했다. 물론 정부는 학생들의 유인물배포에 대해서도 ‘집시법’을 근거로 강력한 탄압을 가했으며 각 대학 당국 또한 정부에 호응하여 시위 관련 학생들에 대해 제적조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80년대 학생운동의 출발기에 해당하는 81년 당시의 학생운동의 교내기습시위 전술 외에 그들의 주장과 요구의 핵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학생들의 주장과 요구의 저변에는 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정권의 권부 핵심에 대한 분노와 투쟁 열의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 정권은 ‘파쇼’라는 규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학생운동은 점차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싹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내용>
81년 3월12일 광주항쟁 이후 80년대 최초의 교내시위 이후인, 3월19일 서울대생 3백여명은 학생회관 주변에서 ‘반파쇼민주화투쟁구호’ 16개를 외치고 ‘반파쇼민주투쟁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 2백여장을 배포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내 기습시위의 시작은 거의 학내 건물의 한 옥상에서 휴대용 확성기를 사용하는 지휘자의 신호로 시작되었다. 교내 기습시위 개시시점은 주로 점심 시간을 전후한 시간대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서울대 교내 시위의 주도는 문용식과 박태건 등 80년 11월 유인물 사건 관련자들이 주도했는데, 이날 이 둘은 학생회관 옥상에서 확성기를 이용해 ‘모이자’고 외침으로써 시위를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여 1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훌라송을 부르며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 해산에 나선 경찰은 학생 70여명을 연행했다고 한다.((한국일보, 1981년 3월20일자) 유인물 배포와 병행하는 대학가의 이러한 교내기습시위 양상은 비슷한 시기 성균관대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5월12일 오전 12시 40분경 경제학과 4년 권선준과 심재환은 가정대 옥상과 교수회관 옥상에서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며 교내시위를 주도했으며 시위 관련 학생 6명이 구속되고 제적당했다.(성대신문, 1981년 5월25일자). 이날 성대시위는 학생들과 경찰과의 투석전으로 나아갔고 80년 광주항쟁 이후 최초의 가두시위로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위형태는 물론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장과 요구를 살펴보는 일이다. 3월19일 서울대 교내시위에서 ‘서울대학교 민주학우 일동’은 광주학살의 참상에 대한 폭로와 학살자 전두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아! 금남로에 뿌려진 수많은 광주 시민의 검붉은 핏방울을 어찌 잊을 것인가! 전두환 집단의 기관포에, 대검에, 군화발에, 장갑차의 캐터필러 앞에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온몸으로 항쟁하다 무참히 도륙당한 2천여 광주 시민의 피맺힌 절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서울대학교 민주학우 일동, <선언문: 반전두환,반파쇼 투쟁의 대열로>, 『암흑속의 횃불: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제4권』,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1996, 462쪽). 5월12일 성균관대 교내시위의 ‘성대 민주학우 일동’ 또한 “광주시민의 피어린 항쟁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반파쇼투쟁이었던 것이다. 5?17이후 민주학우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저들은 대검과 방망이로 무자비하게 나섰으며 더욱이 M16과 기관총 마저 난사하였다. 시가는 온통 피와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것이다.”(성대 민주학우 일동, <선언문: 학우여, 반파쇼투쟁의 대열로 나서자>, 『암흑속의 횃불: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제4권』,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1996, 470쪽) 라고 하며 광주학살의 원흉을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시대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내 기습시위에서 배포된 학생들의 유인물은 이러한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로만 그치지 않았으며, “전두환 타도, 광주진상규명, 노동삼권쟁취, 농민권익쟁취, 집시법폐지, 지도휴학제 폐지, 학생활동보장, 이규호퇴진, 국제독점자본의 종속관계 철폐, 양심수 석방, 관제야당의 자각, 시녀 언론인 각성” 등 나열적이나마 사회의 제반 문제와 모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의 싹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건사전번호 : H-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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