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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사건

제목(Title) : 학림사건 :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전국민주학생연합(전민학련)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10610


사건종료일 : 19810723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0.05.03~05, 전민노련 창립대회
-1981.02월, 전민학련 결성
-07.23, 관련자 30여명 구속
-1982. 01.22, 이태복 무기징역 선고

<사건배경>
1980년에서 1981년에 걸친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의 전반적인 활동은 억압적이고 암울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80년 5?17 쿠데타 이후 81년 2월 전두환 정권의 출범은 노동운동은 물론 학생운동까지도 위축시켰다. 노동운동의 경우에는 여전히 70년대식의 고립분산적인 조합주의적 노선과 활동이 정부의 전면적 탄압을 돌파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학생운동은 활동가들에 대한 제적과 강제징집 조치로 인한 운동주체의 손실이 막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전반의 침체와 전망모색의 와중에서도, 학생운동은 가장 빠른 전열정비와 자기회복을 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의 활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대의 경우, 80년 12월의 ‘무림'사건을 계기로 한 정부의 집중적 탄압 이후에도, 81년 상반기에 접어들며 3월9일의 ‘반파쇼 시국선언'의 학내시위, 4~5월에 걸친 기습시위?유인물 배포투쟁을 전개했고 이러한 활기는 서울지역 타 대학 및 타 지역의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20~21쪽) 이와 같이 학생운동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며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이 엿보이자마자 정부는 또 다시 집중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81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일련의 조직사건들-'부림', '금강회', '오송회', '한울', '아람회'-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그 조직사건들의 한 가운데에 역시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이 있었던 것이다.

<사건내용>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서,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전민학련의 경우에는 국가보안법 집시법을 반국가단체의 성격이 미비한 전민노련의 경우에는 계엄법을 적용시켰다고 하며, 양대조직의 주역들로 이태복을 중심으로 한 중앙위원들을 지목했다.(세계 편집부 엮음, 『公安事件記錄』, 세계, 1986, 243쪽) 이 사건은 1981년 6월10일 당시 도서출판 광민사 대표 이태복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불법연행되면서 시작되었다. 곧이어 6월16일 이선근, 이덕희 등 전민학련 관련자 수십여명이 연행되었다. 이들은 약 한달에서 최고 60일까지 외부와 완전 차단된 채 고문수사를 받았다. 결국 82년 1월22일 조직총책이자 반국가단체 ‘수괴’인 이태복이 무기징역을 받는 등 모두 25명의 관련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검찰의 수사발표에 따르면, 이태복은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첫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대중의 정치?역사의식을 함양시키는 의식화작업을 해야하고, 둘째, 의식화된 활동가들이 사회의 저변을 넓히면서 각자 독자적인 운동의 기반을 형성한 다음, 셋째,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동운동이 주가 되고 학생운동은 노동운동의 보조집단으로서 또한 문제제기집단으로서 기능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1979년 12월경부터 1980년 4월까지 이태복, 김철수, 신철영, 양승조, 박태연 김병구, 유해용, 유동우, 윤상원, 하동삼 등은 노동자조직 구성을 위해 활동했으며, 같은 해 5월 전민노련을 결성하여 이들 10명이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선근에게 혁명의 보조집단으로서 학생집단을 조직할 것을 지시하자, 이선근 주도하에 1981년 2월, 이선근, 박문식, 이덕희, 홍영희, 박성현 등이 모여 민학련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그후 81년 3월부터 6월까지 조직확대, 조직원교육, 학생시위배후조종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상,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29~30쪽 정리)
이상과 같은 검찰이 발표한 양대 조직의 핵심노선과 주장은 핵심관련자인 이태복의 증언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양대 조직의 공통적인 기본노선은 ‘노학연대’의 실질화와 현실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70년대 말과 80년 초반의 학생운동의 한계의 극복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눌려 운동역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고, 운동이념 역시 정립되지 못한 채 민주노조운동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이런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운동 이념의 전파와 각종 조직의 건설, 대중투쟁의 활성화, 노동자 역량의 양성과 강화, 진보적 학생운동가들의 노동운동 전화가 필요했다. 특히 반독재 투쟁의 경험을 가진 학생운동가들을 노동운동가로 성장시키는 일은 노동운동의 발전에 꼭 필요한 과학적 요소였다. 끊임없이 동요하는 이들의 운동의 내용과 진로를 노동운동이 지도하지 않을 경우 민주운동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이태복, 『쓰러져도 멈추지 않는다』, 청년사, 2002, 123~124쪽)
이와 같은 70년대 학생운동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의 ‘서울역 회군’ 사건이었다. 이태복은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의 서울역 회군 결정을 둘러싼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1980년 봄의 정세를 막연한 민주화대세론으로 기대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군부세력에게 자체 정비시간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양김 분열구도의 가시화를 조성했을 뿐이었다. 이선근 등을 통해 학생들이 더 적극적인 투쟁으로 군부의 재집권 기도를 폭로하고, 민주세력의 대단결로 이 국면을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학내 지도부인 서울대의 일부 77학번 그룹과 이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OB 그룹의 일부는 단계적 대중압력 전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 단계적 대중압력은 결과적으로 군부 세력의 시간 벌기와 양김의 집권경쟁을 부채질함으로써 대중의 환상을 조장해 안개 정국에 일조할 수밖에 없었다. 각종 정보와 심리전을 통해 학생운동 지도부의 허약성을 파악한 군부세력은 군부 출동의 명분을 끌어내기 위해 학생들을 거리로 유도했고 당시 지도부는 이들의 음모에 발맞춰 거리로 나섰으나 수십만이 운집한 서울역에서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서울역 해산을 막기 위해 이선근 등이 격렬하게 반대를 했으나 학내 지도부는 오히려 이들을 북한이 내려보낸 스파이, 군부의 선동꾼으로 몰아붙였다. 비상 계엄이 확대되자 다시 모이겠다는 이들의 약속은 공염불이 되었고, 또 사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이들 지도부의 일부가 계엄 확대 직후 계획한 시위에는 수십 명이 모였을 뿐이었다.(이태복, 같은자료, 125~126쪽)
위와 같은 정세인식과 운동노선은 ‘학림’의 입장이었고 당시 이들과 대립을 형성했던 그룹이 ‘무림’ 진영이었는데, 양자간의 입장대립은 흔히 ‘무림-학림’ 논쟁이라 일컬어진다. 위 이태복의 증언에서도 '단계적 대중압력전술‘ 혹은 ’민주화대세론‘ 등으로 표현되듯이, 무림진영은 민주화운동 단계에서 군부독재의 종식과 민주화를 위한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 당시 민중운동의 각 부분들은 자기 대중을 확보하는데 주력해야하며 민주화역량의 성숙과 통일적 지도부의 형성을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통일적 지도부를 조직하고 담당해야하기에 지나치게 정치투쟁에 치중함으로써 탄압에 희생되는 일을 자제해야한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일종의 ’투쟁지양론‘, ’조직보존론’ 혹은 ‘준비론’이라 비판받았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24~25쪽)
이러한 무림진영의 입장과 대비되는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의 학림의 정세인식과 방침은 ‘직접투쟁론’이라 평가받았으며 81년 상반기 학생운동의 새로운 부활조짐을 북돋우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구체적인 활동은 내부 조직원의 확대 및 교육과 함께 1982년 신학기 대학가 투쟁의 주도였다. 이들의 민주화운동의 전의를 불태우게 한 사건은 바로 5?18 광주학살의 과정에서 전민노련 중앙위원이었던 윤상원의 죽음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태복은 전민학련의 결성목적과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광주학살의 비극을 겪고 난 우리는 윤상원과 광주 민중의 죽음을 애도하며 학생운동 재편에 나섰다. 이선근과 박성현으로부터 학내 상황을 자세히 듣고 난 뒤, 반독재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면서 노동자조직과 연대할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중략).... 후배들은 1981년 봄이 되면서 신학기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서울대의 잇따른 시위와 성균관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외국어대, 동국대, 한양대의 시위가 이때 조직된 것이었다.....(중략)...즉, 현장준비를 위해 투쟁을 기피하는 노선이 설득력을 상실했던 것이다.”(이태복, 같은 자료, 127~128쪽)
전민학련이 주도한 81년 상반기의 대학가의 교내시위 열풍은 당시의 억압적이고 수세적인 상황에서는 대단한 것이었고,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공포감을 일거에 불식시킬 수 있었다. 전민노련과 마찬가지로 전민학련의 조직체계 또한 조직보위원칙 하에 구성되었는데, 중앙위원회 산하에 ‘지부-지회-분회-지반’ 등을 두고 분회와 지반은 복수로 구성하여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예비코자 하였다. 지부는 서울, 경기, 부산, 경북 등 대도시 대학소재지를 중심으로 하고 지회는 그 지역에서 작은 단위로 몇 개 대학을 묶어서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과 기획과는 달리 실제 조직체계는 경인지부(지부장 윤성구) 산하에 신촌지회(연대, 이대), 관악지회(서울대), 중앙지회(성대, 동대, 성신여대), 청량리지회(외대, 경희대)로 구성되었다. 각 지회는 과도기적 상태였으므로 지부에 의해 운영되지 않았고 박성현, 박문식 등 중앙위원에 의해 지도되었다. 각 지회의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대학에서 복수의 지반을 구성토록 하였다. 회칙상의 분회는 실제로는 구성된 적이 없었고 지회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전민학련은 서울, 부산만이 아닌 대구, 광주 등으로 조직확대를 하고자 했으나 그 과정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43~44쪽)
한편, 전민노련은 전민학련에 앞선 1980년 5월3일~5일에 걸쳐 창립되었다. 이태복의 주도로 1979년 말부터 개별 만남을 통해 7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과 평가를 공유하며 발기인을 선발한후 창립대회를 가졌다. 전민노련은 결성 후 5?17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회의 정기적 개최, 치밀한 조직사업과 교육활동의 원칙에 입각한 정회원과 예비회원의 꾸준한 확대 등을 통해 일정한 조직적 성과를 내오며 ‘지부-지회-분회’ 체계를 유지하며 서울의 구로지역, 양평동, 평화시장, 뚝섬, 방산시장 등의 지역에서 현장기반을 갖고 있었다. 특히, 두드러지는 전민노련의 활동은 잉꼬법랑 신규노조결성이었다. 그것은 83년까지 대학생출신 노동운동가가 노동현장에서 노조를 결성한 유일한 사례였다고 한다. 또한 전민노련이 개입한 구로공단의 삼경복장의 경우는 어용노조민주화투쟁 역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위 자료, 42쪽) 전민노련은 이외에 특히,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진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노동야학을 현장과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한편, 사건 관련자들은 양대조직이 수사당국의 정보망에 노출되어 와해되는 과정에 대공수사당국의 고용한 프락치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대공분실이 최초로 정보수집을 하게 된 것은 미스유니버스대회 폭파 미수사건 관련자인 황인오와 권오상의 진술에 근거했으며 본격적인 수사는 1980년 11월 운동권내 노선갈등의 첩보를 입수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태복, 같은 자료, 128~129쪽) 그런데 당시 대공수사당국은 강제징집당한 학생운동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태복은 자신의 지인 가운데에서도 프락치가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조직의 보안이 뚫렸을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그는 대구 지역까지 내려가 야학운동으로 위장해서 김병구의 대구 조직과 나의 관계를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신원에 의혹을 품고 있던 나는 기피하는 수준에서 그의 접근을 차단시켰을 뿐 자세한 추적조사를 못했다. 우리는 1981년 6월초에야 노숙영으로부터 대주 지역에서 전모가 위장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전모의 신분과 운영망의 책임자가 누군지는 현재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이태복, 같은자료, 129쪽) 또한 이태복의 법정진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잔혹한 고문과 강압수사를 입증하고 있다.
“맨처음 꿇어앉히고 구타당했는데, ”네가 수괴지? 꼬뮤니스트지?“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처음 들은 용어이기 때문에 잘 못알아듣자 다시 공산주의자이고 수괴가 아니냐고 추궁했습니다.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수괴도 아니다“ 라고 하니 다짜고짜 발가벗긴 채 고문판에 사지를 묶고 물고문을 하며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물고문을 하니까 토하고 위에서 심한 경련이 일어나 비명을 지르니까 수건을 입에 물려 물고문, 전기고문, 발바닥 고문을 하였습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45쪽) 대공분실은 사건을 부풀리고 재야운동세력까지 연루시키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양대 조직과 무관한 김승훈 신부, 박형규 목사, 김찬국 교수와의 관계를 집중추궁하기도 했다고 한다.(이태복, 같은 자료, 130쪽)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의 노선과 활동은 80년대형 운동체계의 최초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노학연대의 구체적 모델을 현실화하고 운동진영 내에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전위적 지도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향후 결성될 볼세비키형 조직들의 노선의 기초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86년의 제헌의회그룹의 조직원들 가운데에는 김철수, 민병두, 윤성구 등 양대 조직의 핵심구성원들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노선 및 활동에 있어서의, 학생운동 중심적인 사고와 노동자들의 대상화 등은 비판적 평가를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사건사전번호 : H-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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