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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롤데이터노조 탄압 및 노조사수투쟁

제목(Title) : 콘트롤데이터노조 탄압 및 노조사수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20130


사건종료일 : 19820719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0.09.18, 노총, 정화조치에 따라 노조간부직 박탈
-1982.01.30, 회사, 노동쟁의 발생신고
-03.12, 회사, 노조 간부 해고
-03.15, 노조, 철야농성 돌입
-04.01, 노조, 해고자 원직복직 결의문 채택
-06.03~04, 노조, 철야농성 돌입
-07.15~16, 회사, 노조간부 집단폭행
-07.19, ‘구사대책위원회’ 구성

<사건배경>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로 집권의 정치적 계기를 확보한 군사독재정권은 8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면 노동운동에 대한 신속하고 전면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것은 70년대 이래 가장 전투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싹을 잘라버림과 동시에 10?26이후 80년 서울의 봄 시기까지 분출되어오던 노동자들의 불만을 일거에 잠재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에 따라, 80년 8월21일의 ‘노동조합 정화지침’은 한국노총 산별위원장 12인의 강제해직과 160여개 지부를 모두 해산시켰다 (2차 정화조치는 9월20일).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이러한 노조간부들의 인적제거뿐 아니라 법적, 제도적 조치와 병행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산별노조체계는 기업별노조체계로 대체되었고, 노동관계법을 개악하여 노조 자체의 결성과 활동을 실질적으로 불가능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더불어, 민주노조들이 강제해산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전면적 탄압 및 와해의 도마위에 올랐던 민주노조들과 그에 대한 강제해산조치의 시기는, 청계피복(81년 1월), 반도상사(81년 3월), 남화(81년 6월), 무궁화메리야스(82년 9월), 원풍모방(82년 10월)이었는데, 그러한 강제해산의 와중에 유일한 외국계 회사로 콘트롤데이터 노조가 자리잡고 있었다.(이상, 전태일기념사업회 편,『한국노동운동20년의 결산과 전망』, 세계, 1990, 100~105쪽; 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42~43쪽 참조)

<사건내용>
한국 콘트롤데이타㈜는 미국의 다국적기업 자회사중의 하나였다. 1967년 서울 영등포구 염창동에 컴퓨터 기억장치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한 후 1974년 영등포구 가리봉동 수출공단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회사는 공장설립 이후 1980년까지 수출액 2천4백만달러로 12배의 수익이 증대한 반면, 동 기간동안 3회에 걸친 노동자 집단해고를 통해 장기근속자로 인한 임금지출의 증액 요인을 제거하고, 생산성의 증대를 위해 노동강도를 무리하게 강화시켰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위장병, 치질, 눈병, 두통, 신경통 등의 질병에 일상적으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1973년 12월20일 7명의 발기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들을 내실있게 전개해왔다. 그러나, 1980년 계엄사령부의 노동계 정화조치는 콘트롤데이터 노조도 예외가 되지 않았고, 9월18일에는 지부장 이영순과 부지부장 유옥순은 강제로 직책을 박탈당하고 평조합원으로 현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80년 12월14일에서 1982년 2월까지 노동조합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며 13차례에 걸친 노사협의과정을 통해 해고자복직 문제를 지속적으로 이슈화시켰다. 이 와중에 회사는 1982년 1월30일 일방적으로 노동쟁의 발생신고를 하였고 이에 대해 노조는 2월23일부터 25일까지 준법투쟁을 전개했다. 3월12일 회사의 대응은 노조 간부 6명의 해고였다. 이에 따라 이영순 전 지부장, 유옥순 전 부지부장, 이태희 총무부장, 박영선 섭외부장, 김미규 운영위원, 박인순 대의원이 정화조치의 명목하에 부당 해고를 당했다. 3월14일 노조는 임시운영위원회를 열고 부당해고철회, 근로조건개선 등을 요구하며 3월15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6월4일까지 노조는 미국 본사 간부들과의 대화 시도, 노동부에의 탄원 등 비교적 타협적 해결책을 통해 문제를 풀어보려 했으나 투쟁목표를 쟁취할 수는 없었다. 노조는 6월4일 미국 본사간부들과의 협상회의장에서 문제해결의 촉구를 주장하며 농성을 전개했는데, 이것을 빌미로 미국 본사측은 한국정부에 ‘노동자들에게 감금되었으니 구출해달라’ 는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농성노동자들은 경찰에 폭행당하며 연행되기도 했다.
한편, 7월15일에서 16일 양일간에 걸쳐 회사측 남자사원들은 공장철수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산계 조합반대’를 주장하며 조합간부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폭행했으며 7월19일에는 ‘구사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조측의 대응은 이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회사는 결국 7월20일 공장철수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상, 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50~53 참조)
한편, 이러한 미국 본사의 노조탄압공작과 공장철수 협박에 대해 노조원들은 다음과 같이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다.
“회사는 82년도 임금인상을 위한 단체교섭을 하면서 정부의 탄압적인 노동정책에 편승하여 노조간부 6명을 해고시키고 이로 인해 심각한 노사분규를 초래했었다. 그런 후 미국 본사는 해고 근로자를 복직시키려 하지 않고 일방적 공장 철수 계획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노동부가 6명의 해고 근로자를 복직시키는 데 반대하기 때문에 공장을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면서 그동안 장기적으로 추진해온 공장폐쇄 계획을 감추려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즉, 근로자들의 생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윤확보에만 혈안이 된 다국적 기업의 철저한 횡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콘트롤데이타사 노조원 일동, <결의문?미국본사의 결정에 항의한다>, 기쁨과 사목 희망연구원, 『암흑속의 횃불: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제5권』, 1996, 317쪽)
콘트롤데이터 노조탄압은 80년대 초반의 군부독재정권의 불법적인 노동계정화조치, 위축된 민주노조운동 진영과 수세적 대응의 불가피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것은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노동착취 및 노조탄압의 실상을 그대로 폭로한 사건이었다.


사건사전번호 : H-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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