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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연세대생) 군 의문사사건
-‘의문사진상규명위’ 진정 제62호 사건

제목(Title) : 정성희(연세대생) 군 의문사사건
-‘의문사진상규명위’ 진정 제62호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20723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62년 1월 출생
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입학
1981년 11월 25일 시위관련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음
1981년 11월 28일 강제징집됨
1982년 1월 4일 자대 배치 이후 학원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옴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삶과 죽음> (http://ugh.or.kr/hacksang/hacksang6.html#정성희)
국민학교 때는 전교 어린이 회장에 뽑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는 남달리 독서를 많이 하여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였고 비교적 과묵하고 조숙한 학생이었던 정성희 동지는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 노래 선창으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되어 강제징집을 당하여 군 복무 중인 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 당국측에서는 철책 초소 보초경계 근무 중 총기자살로 통고했으며, 유가족에게 자살 동의서를 날인받은 후 간단한 영결예배를 마치고 고양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동지는 유서는 없었고, “또 백양로를 걸어보고 싶다.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윤희(동생)야 네가 배운 지식을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들을 위하여 활용해라” 라는 낙서 쪽지를 가지고 있었다.

<진정 내용>
■ 인적사항
-성명; 정성희(鄭星熙)
-생년월일; 1962년 6월14일생
-직업; 군인(계급 일병)
-사망일; 1982년 7월23일(당시 20세)
■ 진정 취지
정낙헌은 정성희가 학생운동 경력으로 인하여 자대 전입 후 관심사병으로 분류되었고 보안부대의 감시, 조사, 프락치활동 강요 등을 받았고, 이것이 정성희의 사망과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낙헌은 정성희의 자살을 목격한 임0구의 진술을 믿을 수 없고 정성희의 사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점 등을 들어 정확한 사인 규명을 요구했다.
■ ‘인정되는 사실관계’
1)사망 이전의 행적
정성희는 1981년 3월 연세대학교 어문계열에 입학한 후 5월 동아리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9월 선배들이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동아리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정성희는 ‘방언민속연구회’에 가입했다. 정성희는 동아리 활동외에, 조직활동을 별도로 하였는데, 82년 9월 ‘오천여 신입생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이0우와 함께 제작, 배포했다. 또한 같은 해 9월30일 학내에서 개최된 독재정권 반대시위, 10월26일 1학년 문과대생들의 군사집체훈련 반대시위에 참여했다.
정성희는 1981년 11월25일 교내에서 개최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어 시위와 관련된 조사를 받았고, 서대문경찰서는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로부터 군입대 조치 지휘를 받아 28일 101보충대로 정성희를 인계했다. 이 과정에서 정성희 등은 정상적 입영절차를 받지 않고 강제입영되었다. 특히, 정성희는 1981년 11월28일 입대 당시 만 19세로 지원입대의 형식이 아니면 입영연령에 해당되지도 않았으며, 휴학조치 또는 군입대 동의 절차조차 거치지 않았다. 또한 1981년 11월25일의 시위에서 연행된 학생들의 대부분은 훈방되고, 주동자 2인은 구속되었는데, 정성희 등 15명은 입대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전원 입영조치되었다.
정성희는 신병훈련 후 1982년 1월14일 자대배치를 받는데, 학생운동 경력과 관련하여 보안부대의 지속적인 감시와 관찰을 받았다. 이는 근무부대 소대장 및 연대 보안반 사병과 휴가시 만난 지인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되었다. 정성희는 1982년 6월9일부터 21일까지 첫 휴가를 받았고, 그 대부분을 흥사단 아카데미 동아리방에서 회원들과 함께 보냈다. 정성희는 당시 복귀하면 조사를 받을 것이므로 자신에게 학교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2) 사망 경위 사실’
휴가 복귀 후 정성희는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고, 사망 3~4일 전 점심 무렵 내무반 근처에서 주위 동료들에게 “이제 72시간 남았다. 휴가를 가게 되면 학교의 동료들에게 내가 먼저 간다고 전해 주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사망 2~3일 전부터 자신의 전투화와 라이터 등을 동료들에게 나눠 주었다. 사고 당일인 1982년 7월22일 오후 정성희는 동료들에게 “밤 12시에 죽을 것이다”는 말을 하며 휴식시간에 유서를 작성하여 동료에게 보여주었다. 7월 23일 오전 0시 10분경 정성희가 근무하던 26초소에서 연발총성이 들렸고, 분대장이 가보니 정성희는 머리 위쪽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정성희는 총기(M60)를 거치대와 초소벽 사이에 놓고, 총의 개머리판을 양발로 끼고, 총구를 목에 댄 상태에서 우측 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살동기로는, 보안부대로부터 휴가기간 중 동아리와 학교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및 보고를 요청받았고, 휴가 복귀 후 보안부대의 진술강요와, 그에 대한 거부가 쉽지 않은 상황, 그와 연관된 자책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판단’
첫째, 정성희는, 연세대 동아리 활동과 독재정권 비판 유인물 작성 및 배포, 독재정권 및 군사집체훈련 반대시위에 참여 등의 민주화운동을 했으며, 군입대후 보안사의 진술강요 등에 못이긴 그의 자살은 불법적 행위에 대한 항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했다고 인정된다.
둘째, 정성희의 사망은 강제징집과정의 불법성, 보안부대의 진술강요의 적법성, 그와 정성희 죽음과의 인과성을 볼 때, 공권력의 위법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된다.(이상,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보고서 : 1차(2000.10~2002.10) Ⅳ』, 2003년, 687~699쪽에서 요약정리)


사건사전번호 : H-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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