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노동과 노래’ 책자 사건

제목(Title) : ‘노동과 노래’ 책자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20909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2.09.09, 발간인 허병섭 목사 연행

<사건배경>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중반까지 노동/민중운동내의 대표적 문화 중의 하나는 바로 '노가바'였다. '노가바'는 기존의 대중적 유행가의 곡에다 가사를 바꾼 노래들을 일컬었다. 특히 인천 동일방직, 영등포 원풍모방, 청계피복, YH 등 민주노조의 투쟁의 현장에서 노가바는 빼놓을 수 없는 문화활동 메뉴 중의 하나였다. 열악한 노동조건, 살인적인 저임금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고 비명이라도 질러야 했으며, 상급자나 회사 간부의 몰인정과 학대, 사장의 속임수와 위선에 대해 침묵할 수 없기에 노동자들은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이미 유행하는 노래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고 노랫말을 바꿨던 것이다.(허병섭, <저작권법까지 동원된 ‘노가바’ 탄압: ‘노동과 노래’책 사건>, 한승헌선생 회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分斷時代의 被告들』, 범우사, 1994, 390쪽)
이러한 노가바는 민중?노동 문화의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은 독자성이 이루지 못하고 있던 시기의 과도기적 문화유형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가바 나름의 창조성과 현장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허병섭 목사는 민중교육의 관점에서 바로 이러한 노가바의 현장성에 주목하고 기록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는 노가바 자료들을 수집하고 현장별로 분류하여 각 특성을 첨부하여 자료집을 냈는데 그것이 바로 문제가 된 ‘노동과 노래’ 책이었다.(위 자료, 390~391쪽)

<사건내용>
허병섭 목사는 이동철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실제 주인공으로서 노동현장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는 ‘노가바’의 가사와 곡을 모아 ‘노동과 노래’라는 책자를 만들어 노래연구모임의 회원들에게 비매품으로 배포했다. 허병섭은 후일 책자 발간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1981년 문동환 박사님과 함께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70년대의 민중선교와 운동을 회고하면서 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민중교육이라는 과제를 통해 찾아보려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과 선교의 자리에는 항상 노래가 있었다. 1970년대에 나는 이들의 노래에 주목했다. 조직의 힘을 기르고 의식을 다져나갈 뿐만 아니라 힘든 투쟁의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 노래였다. 싸우면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노래는 민중이 싸우는 도구이며 무기였다.” (허병섭, 같은 자료, 390쪽.)
허병섭에 따르면, 1982년 여름 어느날 안기부의 김모 수사관이 찾아와서 ‘노동과 노래’책 70부를 압수해 갔었는데 그후 그는 중부경찰서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어 관련 조사를 받았다. 수사당국은 허병섭에 대해 별다른 꼬투리를 잡기 어렵게 되자, ‘음악저작권협회’를 내세워 저작권침해 혐의로 허병섭을 고발했다. 우스운 것은 저작권 보상건에 관련된 사건을 공안부 검사들이 담당을 했다는 것이다. 불구속상태에서 치러진 재판과정에서 허병섭과 담당변호사들(1심 김동현, 2심 한승헌)은 배포규모와 대상의 비상업적 성격을 주장하며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음을 변호하여 결국 2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으나 대법원은 원심파기결정을 내렸다. 결국 1990년의 재판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받게 되자 허병섭은 상고를 포기했다.
이 ‘노동과 노래’ 책 사건은 군부독재정권이 민간 이익단체인 ‘음악저작권협회’를 내세운 민중문화운동에 대한 탄압이었다. 피해자인 허병섭은 이를 ‘정보사찰기구의 치사한 집착’ 이었다고 평가한다.(허병섭, 같은 자료 391쪽.) 그러나 이러한 간섭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후 80년대 중/후반이래 민중문화운동은 노가바의 수준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문화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사건사전번호 : H-1029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