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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서울대생) 군 의문사사건

제목(Title) : 한희철(서울대생) 군 의문사사건
: 의문사진상규명위 진정 제53호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31211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61년 2월 1일 경남 마산에서 출생
1979년 2월 철도고등학교 졸업
3월 서울대학교 기계설계학과 입학(철도청 장학생)
1982년 12월 1일 군에 입대
1983년 12월 11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진정 내용>
■ 인적사항
-성명; 한희철(韓熙哲)
-생년월일; 1961년 2월11일생
-직업; 군인(계급 일병)
-사망일; 1983년 12월11일(사망 당시 만 22세)
■ 진정 취지
첫째, 한희철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4학년 재학 중 군입대한 후 휴가를 나와 당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수배중인 한국외국어대 운동권 학생 신0근(가명 김무현) 및 친구들에게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사실이 보안사령부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군 보안부대에서 조사들 받던 중 고문 또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둘째, 진정인(한상훈)은 한희철의 사망현장에서 발견된 유서가 조작되었을 가능성, 당시 한희철이 군대 내의 녹화사업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타살되었을 가능성, 격발된 3발의 삼각형 총탄 자국의 의혹, 사고발생 후 부대관계자들이 답변을 기피한 이유 등에 대하여 진상규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 ‘인정되는 사실관계’
‘1) 한희철의 사망이전의 행적’
한희철은 1979년 3월1일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고, 1979년 5월 학내 서클인 ‘카톨릭학생회’에 가입하여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졌다. 그는 1980년 겨울 성남 YMCA내 근로자분과인 ‘탄천클럽’을 조직하여 지역 학생들과 민주주의와 지역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였고, 1981년 1월 야학 ‘샘터교양교실’의 교사로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법 강의, 법률상담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고취시키고 특히 노동현장에서의 인권문제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1981년 10월 한희철은 ‘성남지역대학생연합회’의 결성을 주도하며 학술부 세미나팀장을 맡았고, 1982년 7월 성남 수진동 성당에서 운영하는 ‘만남의 집’에서는 가톨릭학생회 소속 회원들과 함께 부당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그후 한희철은 아버지 한상훈의 권유에 따라, 1982년 12월1일 육군 제101보충대에 입대하여 12월5일 육군 제0사단으로 전입하였고, 1983년 1월15일부터 육군 제0사단 사령부 부관부 행정병으로 근무했다. 한희철은 전역 후 노동사목 신부로서 활동할 생각을 했고, 사건 발생 당시는 의가사 전역을 앞두고 있었으며, 부대에서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2) 한희철의 사망원인이 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위 사실
한희철이 보안사에 연행된 경위는, 군입대후 휴가기간 중 입대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수배자 신0근을 돕기 위해 친구인 동사무소 방위병 전0일을 통해 주민등록증용지를 구하려고 했으나 그를 만나지 못하여 전0일에게 부탁메모를 전달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후 보안사는 신0근을 체포하여 조사하던 중 한희철의 메모를 발견하고 83년 12월5일 오후 한희철을 연행했다. 한희철은 12월8일까지 보안사 3처 0과 심사장교 유0남에게서 조사를 받았다. 이 조사과정에서 한희철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내키 힘든 폭행 또는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첫째, 심사장교 유0남은 한희철에 대한 폭행과 협박사실을 시인했다. 둘째, 12월10일 저녁 10시경, 부대 고참병 김0인은 보안사 조사를 받고 복귀한 한희철로부터 “다시 조사받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죽을 뻔했고 혼났다.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들었으며 허리와 다리의 폭행상처를 보았다 셋째, 부대 동료인 이0구는 같은 날 오후 2시경, 한희철로부터, “고문에 못이겨 동료와 조직을 털어놓지 않으면 보안사를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는 말을 듣고 위로를 했다고 한다.
한희철은 위와 같은 가혹행위와 함께 조사를 받은 후 소속대로 복귀한 당일 작성한 유서에, “이 땅의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인간의 책임입니다”라는 내용을 기재한 점, ‘성남 Y총무에게 보내는 글’에 “저 하나의 실수로 인해 수많은 친구, 선배, 후배들이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도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여있었고 보안사의 수사가 얼마나 치밀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살아나가려면 진술을 해야하고, 진술을 하다 보면 연이은 취조에 사정없이 사건은 커질 거고 난감했습니다.”라는 내용을 기재한 점 등을 비춰볼 때, 한희철은 당시 운동권 동료와 조직에 대한 진술로 인한 죄책감, 가혹행위로 인하여 운동권 활동에 대해 진술을 하였다는 좌절감, 보안사에 재소환되어 프락치로 이용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매우 강하게 느끼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3) 한희철의 사망경위 사실’
1983년 12월11일 새벽 4시 25분경, 임0수는 한희철이 근무하는 경계호 쪽에서 난 연발 총소리를 듣고 즉시 경계호로 가서 사고발생을 인지했고, 그 후 다시 행정반으로 가서 일직사관 김0숙에게 사고발생 사실을 보고했다. 이어 김0숙과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상황실 근무 헌병 2명은 사고현장인 경계호에 도착하여, 김0숙은 경계호 안에서 왼쪽 옆으로 누워있는 한희철에게 다가가 방한복을 헤쳐 3발의 총탄자국이 패여 있는 것을 확인했고, 헌병 2명 중 1명이 경계호 옆에 있는 한희철이 소지한 총기(M16)를 들어 약실 내에 장전된 실탄과 탄창을 제거하고 안전조치를 한 다음 경계호 위에 내려놓았다. 이 총기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로 한희철이 자신이 소지한 총기로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당시 경계근무조인 임0수는 총소리 전후에 경계호 주변에 인기척이 없었다고 하고, 둘째, 사체 상태를 관찰한 결과 한희철의 손과 방아쇠의 거리가 멀지 않고 탄흔분석은 밀접사로 확인되고 가슴부위의 탄착점은 100도 이상의 활 모양으로 연발사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셋째, 한희철의 유서에, “여러분께 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죽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는 등의 내용이 있고, 넷째, 한희철이 사망당일 경계근무중 임0수에게 “나중에 내무반 사람들과 돌려보면 알 거다”고 말하면서 편지(유서)를 전달한 점 등이다.

■ 진상규명위의 ‘판단’
위와 같은 제반 정황을 종합할 때, 첫째, 한희철의 자살은 당시 권위주의 공권력 행사에 항거한 것으로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으로 판단되고 이에 따라 한희철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였다는 것이 인정된다.
둘째, 한희철의 사망은 보안사의 불법적인 연행, 조사 및 폭행, 가혹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음을 인정한다.((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보고서 : 1차(2000.10~2002.10) Ⅳ』, 2003년, 594~606쪽에서 요약, 정리)


사건사전번호 : H-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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