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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규탄투쟁

제목(Title) : 광주학살규탄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40517


사건종료일 : 19840518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4.05.17, 서울지역 17개대 광주학살 규탄대회 및 가두시위
-05.18, 서울대 ‘광주민주항쟁영령위령제’ 개최

<사건배경>
1984년부터 시작된 학생운동의 특징중의 하나는 시기별 집중이슈의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즉, <3~4월의 학원민주화투쟁-5월 이후의 사회민주화투쟁>이 최소한 9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의 기본일정표에 가까운 것으로 자리 잡았으며, 1984년도가 그 시발점이 되는 해였다. 84년 봄 학원민주화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한 학생운동은 5월 들어 아직까지도 금기시되고 있던 광주학살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주장하며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불법성과 비도덕성에 대한 폭로투쟁을 펼쳤다.

<사건내용>
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는 쉽게 잠재워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5월17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각각 교내시위를 벌인 후 서대문로터리, 청계천 5가 등지에서 가두시위를 감행했으며 경찰과의 대치도 불사했다. 이날의 교내시위는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외국어대,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건국대, 국민대, 동덕여대 등에서 있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진압경찰에 맞서 학교 담을 부수거나 집단으로 새총을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5월18일 서울대생 2천명은 광주민주항쟁영령위령제를 개최하고 파고다공원에서 ‘민주의 날’ 전야제를 가졌으며, 서울동부지역 4개 대학생 2천5백여명은 외대에 집결하여 광주학살규탄대회를 가지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그 사이에 일부 학생들은 이문파출소 쪽의 학교벽을 부수었으며 경찰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카빈소총 5백2십정과 M1소총 1백80정을 청량리 경찰서로 긴급이동시켰다고 한다.(이상, 한국일보, 1984년 5월19일자)
이러한 학생들의 광주학살 책임자 규탄 및 진상규명은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인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이후 노태우정권 시기까지 민주화운동의 기본 이슈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시에 학생운동에게 광주학살규탄투쟁은 8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주요한 동원의 자원이 되었다. 84년 상반기를 통해서 학생운동은 학원자율화 및 광주학살 등의 이슈를 중심으로 대중적 지지와 참여를 거의 완벽히 회복해가고 있었는데, 이는 문교부의 공식집계자료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6월14일 문교부가 국회에 제출한 관계 자료에 따르면, 84년 3월1일부터 6월5일까지 주요 12개 대학에서만 216차례의 시위와 시위참여자는 11만8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같은 기간의 주요 대학별 시위 횟수를 보면 서울대 32회, 연대 26회, 고대 23회, 성대 24회, 서강대 19회, 중앙대 14회, 경희대 13회, 한신대 13회, 한양대 13회, 외국어대 12회, 이화여대 16회 등으로 각 대학별 주 평균 1~3회의 시위가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84년 6월14일자)


사건사전번호 : H-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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