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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부활 및 학원민주화투쟁

제목(Title) : 총학생회부활 및 학원민주화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40920


사건종료일 : 198410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4. 09.20, 고려대 총학생회 부활
-09.25, 연세대 총학생회 부활
-09.27, 서울대 총학생회 부활
-10.04, 이대생 졸업정원제폐지 요구 농성
-10.05, 서울대생, 학원수호비상총회 및 철야농성
-10.08, 연,고대생, 학생회인정 요구 가두시위
-10.08, 중앙대 불문과 일문과 학생 및 학부모 폐과조치 항의 철야농성
-10.08, 경희대생, 공대이전 반대시위
-10.10, 서울대 복학생들, 관악서 연좌농성
-10.10, 세종대 지리학과, 일문과생, 학과조정 반대농성
-10.10, 경희대 러시아어과생, 폐과조치 항의농성
-10.12, 고대생, 총학생회인정 요구시위
-10.15, 상명여대 이전반대 시험거부 및 철야농성
-10.16, 경희대생, 수원이전 반대시위
-10.22, 서울교대생, 졸업생임용보장 요구시위
-10.24, 서울대생, 학원프락치사건 관련 중간고사 집단거부
-10.24, 서울농대생, 학내 경찰진주 항의농성
-10.25, 외대생, 폭력교수퇴진 요구 교내시위
-10.30, 서울대 ‘반독재민주화축제’ 개최
-11.01, 서울대 ‘메아리’ 회원 10여명, 용공혐의로 연행
-11.02, 성대민주화추진위원회 및 총학생회부활준비위 결성 및 시위
-11.05, 숭전대생, 무능교수퇴진 농성

<사건배경>
84년 하반기의 학생운동의 투쟁방향은 크게 네 갈래로 잡혀졌다. 그것은 전두환의 방일을 계기로 한 방일반대투쟁, 85년 12대총선을 대비한 반독재연합투쟁,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 및 수재민피해대책 등을 위한 민중지원투쟁, 마지막으로 학생회부활 및 학원민주화투쟁이었다.(강신철 외,『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69~73쪽)
84년 하반기의 학생회부활 및 학원민주화투쟁은 학생운동에 유리하게 조성된 유화국면의 정세를 대중적, 조직적으로 수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그만큼 학생들의 누적된 불만은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별 대학에서는 총학생회를 지향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학생회부활위원회’(준비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독자적이고 특수한 학내문제의 이슈화를 위한 임시적인 사안별 특위들이 건설되었고, 학생들과 대학당국 및 경찰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 학생운동 전반은 ‘서울대 프락치사건’을 계기로 유화국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학원탄압중지’, ‘학생회부활’ 등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교측의 일방적인 학사행정 및 학생간부징계에 대해서는 수업 및 시험거부, 총장실 등 학내 건물점거농성 등으로 맞섰다.

<사건내용>
총학생회부활 및 학원민주화투쟁을 서울지역 주요 대학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희대(-공대 수원캠퍼스 이전 반대투쟁)
학교측의 일방적인 공과대 수원캠퍼스 이전계획에 항의하는 공대생들은 10월8일 교내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15일까지 일일시위를 벌였다. 15일 오후 2시경 150여명의 학생들은 공대건물 앞 시위를 마친 후 저녁 7시경 횃불 20여개를 들고 총장실이 있는 본관진입을 시도하다가 현관 유리창을 깨뜨린 뒤 도서관2층 제2열람실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학교측은 수업과 시험거부 등의 학사행정 방해를 빌미로 시위 주동자 5명을 제적하는 강경대응을 했다. 제적자는 정원영(鄭源永 21, 행정4년, 학원민주화추진위원장), 정정옥(鄭貞玉 24, 가정관리4), 김갑성(金甲性 21, 전자공학3, 공대이전반대투쟁위원장), 모창균(牟倉均 22, 전자공학3년, 부위원장), 신언직(申彦直 20, 전자공학3년) 등이었다. (동아일보, 1984년 10월9일, 16일자)
그러나 학생간부들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는 학생들을 더욱 자극하여 23,24일에는 교내시위가 더욱 확산되었고, 임시휴강조치가 내려진 10월25일에는 학생 700여명이 본관 앞 분수대에 모여 수원캠퍼스 이전계획 철회 및 총학생회 부활 등을 요구하며 20여분간 교내시위를 벌였다.(한국일보, 1984년 10월26일) 이외에도 경희대에서는 폐과조치에 항의하는 러시어어과 학생들의 항의농성이 있었다. 이 사태는 결국 심태식(沈泰植) 총장 등 보직교수 32명의 사퇴로 일단락되었다.(동아일보, 1984년, 10월26일자)
■외국어대
외국어대의 학원민주화투쟁은 용인캠퍼스 학생들의 불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용인캠퍼스 학생들은 서울본교 수강과 총장사퇴 등을 요구하며 10월10일부터 대학원 소강당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25일 교내시위 등에도 학교측의 답변이 없자 29일에는 교학처장실 진입을 시도했다. 30일 학교측 긴급교무위원회는 이 과정에서의 기물파손을 문제삼아 관련 학생들의 엄중 징계방침을 공고하는 한편, 단계적인 문제해결 의지 및 학생대표기구와의 대화의사를 밝히기도 했다.(한국일보, 1984년, 10월 26일, 31일자)
■고려대
고려대의 총학생회부활투쟁은 타 대학에 비해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이었다. 84년 상반기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성과는 9월17일의 총학생회선거(투표율 54.71%)로 이어졌고 김영춘(金榮春)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지금 시점에서 총학생회의 공식인정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학생회의 자율성 및 대표성에 대해 부정적이고 유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대해 총학생회는 “학교당국과는 꾸준한 대화로 길을 모색해 나가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학교당국의 성의와 용기있는 태도다” 라며 오히려 학교측에 비해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대신문, 1984년 9월24일자)
총학생회와 학교측이 가장 첨예한 대립선을 보이게 되는 쟁점은 ‘예산’문제였다. 총학생회측의 학생자치활동을 위한 예산확보라는 요구에 대해 학교측은 예산동결로 맞서며 여전히 학생회불인정 입장을 고수했다. 10월26일 ‘비상학생총회’에서 부총학생회장 허인회(許仁會)는 “학교당국에 ‘예산대책특별위원회’의 구성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며 “총학생회비 수납운동과 모금운동을 병행하여 총학생회 예산을 확보해 나감과 동시에 학생자치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대응책을 밝히기도 했다.(고대신문, 1984년 10월29일자) 이날 집회후 학생 1천5백여명은 ‘총학생회결사수호’, ‘(경찰의) 불법연행 중지하라’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에 맞서 교문시위를 벌였다.(한국일보, 1984년 10월27일자)
이외에도, 서울대에서는 프락치사건과 관련된 학생간부들의 징계에 맞서 중간고사 거부 및 농성투쟁을 벌였고, 중앙대?세종대의 폐과 및 학과조정대상 학생들의 반대투쟁, 상명여대 이전반대투쟁, 숭실대의 무능교수퇴진투쟁 등이 잇따랐다.
이러한 독자적 학내이슈들은 총학생회 부활 및 재건의 대중적 원동력이 되었고 이후 총학생회는 대내적?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해나가게 되었다. 마침내, 11월에 이르면 학생회간 협의체인 ‘전국대학생대표기구회의’가 결성되어 임시적이지만 ‘전학련’의 맹아 역할을 수행했다.


사건사전번호 : H-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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