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안기부 4개 간첩망 검거사건

제목(Title) : 안기부 4개 간첩망 검거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0320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5.03.20, 안기부, 수사발표

<사건배경>
1985년 3월19일 안기부는 ‘서울?안동거점 간첩단’-‘입북간첩’-조총련연계간첩‘-’자수간첩‘ 등을 엮어 ’4개 간첩망‘ 사건을 발표했다.
85년경부터 안기부의 간첩사건 수사발표에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올림픽을 겨냥한 북한의 방해공작에 대한 정부의 경계감이 담겨있는데, 이는 사건 자체의 진위여부를 떠나 정부가 간첩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느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85년 2?12 총선에서 야권 신당인 신민당의 부상과 여당인 민정당의 실질적인 패배가 정권위기감을 더욱 부추겼음을 감안할 때, 다가오는 87년 정권교체기를 위한 다양한 공작정치의 일환으로 간첩사건이 활용되었을 여지는 충분하다. 총선 직후, 당시 정권핵심부와 신군부세력은 불안과 위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우리 당의 많은 의원이 사기가 죽고 의욕을 상실하고 패잔병 같이 해서 사기가 땅에 떨어졌어요.”(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 』, 조선일보사, 1992, 147쪽) 라고 여당내 패배의식을 한탄했으며, 군부내에서는 친위쿠데타설이 흘러나왔고 안기부가 정치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키로 하며 2?18 개각시 전두환의 최측근인 경호실장 장세동이 안기부장 발령을 받았다.(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418~419쪽)
본 사건인 4개간첩망은 장세동의 안기부장 취임 직후 발표한 사건이었으며, 안기부는 수사발표 이후의 대국민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간첩망이라고까지 부를 수 없는 ‘자수간첩’까지 포함시켰다.

<사건내용>
다음은 1985년 3월20일 안기부의 수사발표 자료에 근거하여 동아일보 1985년 3월20일자가 보도한 사건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안기부는 서울과 안동을 거점으로 지하간첩망을 구축, 암약해온 김철 등 4개 간첩망 14명을 검거, 간첩 8명을 구속하고 개전의 정이 뚜렷한 4명은 불구속송치, 자수자 2명은 방면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이들 간첩들로부터 판건식 무전기 2대와 난수표 등 81점을 공작물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 서울?안동 거점 간첩단
6?25 당시 월북한 배창환(裵昌煥 70)이 위장전향한 재남간첩 김철에게 접선, 지령하여 구축한 지하망이 서울?안동 거점 간첩단이다.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이 포섭한 인물들은, 주로 6?25 당시 좌익활동을 하며 부역한 고령의 인물들과 택시운전사, 호텔종업원 등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주요 간첩활동은, 재남간첩망 구축 및 북한안내원 접선원조, 25년간 재경 영남인 친목단체인 상우회에서 시국비난과 불신풍조 조장, 대학가 데모상황 및 노조분규현황에 관한 정보수집 및 보고 등이었다.
■ 입북간첩
이창국 6?25 당시 월북한 형과 누나, 동생의 좌익사상에 영향을 받아 59년 남파간첩인 동생 이흥국이 남파되었을 때 포섭됐다. 그후 62년 8월 이창국은 남파간첩인 형을 따라 월북하여 간첩교육을 받은 뒤 인천시 송림동에서 문방구점을 경영하며 간첩활동을 해왔다. 이창국은 또한 누나인 이도자의 지령에 따라 미군 미사일의 위치 및 시설현황 등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북에 보고하는 등 25년간 간첩활동을 해왔다.
■ 조총련연계간첩
여수동은 82년 9월 일본에 건너갔다가 조총련중앙상임위원인 고종사촌형 이호모에게 포섭돼 그의 집에서 간첩교육 및 지령과 함께 공작금으로 일화 60만엔을 받고 국내에 잠입, 군부대 실태 및 경북 월성 원자력 발전 현황 등을 탐지, 5차례 일본에 건너가 이호모에게 직접 보고했다.
■ 자수간첩
김명우는 84년 4월 일본에 건너가 재일 북한공작원 심재능과 접선, 사상교육을 받은 후 군부대 위치등을 보고했으나 월북과정에서 심경변화를 일으켜 84년 6월15일 귀국 후 자수했다.


사건사전번호 : H-1062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