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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 파업투쟁

제목(Title) : 대우자동차 파업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0416


사건종료일 : 19850425


사건내용 : <사건경과>
-03.22, 노조, 임금인상요구서 제출
-04.06, 회사, 교섭일자 연기
-04.08, 비상 조합원 1차 총회 개최
-04.09, 비상 조합원 2차 총회 개최
-04.15, 임금교섭 결렬
-04.16, 파업 돌입
-04.18, 김우중 회장 파업자제 호소
-04.19, 철야농성 돌입(기술센터 3층)
-04.22, 교섭 결렬, 경찰철수 요구 가두시위
-04.23, 홍영표 대의원과 김우중 회장 단독협상
-04.25, 김우중 회장 합의서 서명 및 파업 해제

<사건배경>
전두환 정권은 83년 말부터 제적생 복교조치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진영에 대한 일정한 유화정책을 구사했다. 정부는 85년 2?12 총선에서 드러난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을 수습하기 위해 유화정책을 지속화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유화국면에서 대량적인 물리적 탄압 없이 전개된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투쟁이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이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은 정부의 유화정책이 포괄하지 못하는 지점, 즉 재벌과 기업들을 위한 노동정책에 대한 대중적 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당시의 정부 노동정책은 경제위기 상황을 빌미로 국제경쟁력 강화, 물가억제를 내세우며 지속적인 임금억제정책을 강제하였다. 여기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임금 가이드라인을 5.2%로 제시하며 저임금유지정책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맥락 하에서, 85년 4?16 대우자동차 파업의 구체적 배경에 좀 더 근접하기 위해서는 84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84년 8월에서 11월까지, 초기에 서울대 출신의 송경평과 노조민주화를 열망하는 40여명의 조합원들은 체불된 상여금과 현역복무기간의 근속연수산정을 요구하고 당시 어용노조에 항의하며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같은 해 12월, 부평 공장에서 어용노조의 방해공작을 뚫고 노조민주화파의 당선을 낳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은 현장의 조합원들 사이에 어용노조의 실체와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인식케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파업투쟁으로 가는 길을 놓은 것이었다.

<사건내용>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불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우자동차는 84년에 회사 창립이래 최대인 145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다.(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72쪽) 이런 성과는 85년 임금투쟁을 앞둔 노동자들 사이에 대폭인상에 대한 기대감을 낳게 하였으나 당시의 어용노조는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금인상투쟁은 노조민주화투쟁과 병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조합원들의 임금인상 열기를 업은 노조민주화파가 노조집행부를 강제하게 되었다. 그 결과, 3월22일, 노조집행부는 기본급 18.7%의 인상 및 최저생계비 부족분의 제 수당으로의 대체라는 요구를 내건 임금인상요구서를 회사측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측은 4월6일 예정된 교섭을 16일로 연기시켰고, 이에 반발한 조합원들은 4월 8일, 9일 연이어 비상조합원총회를 개최하는 등 현장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5일 재개된 협상에서 회사측이 내세운 임금안은 임금 5.7%인상 및 제 수당 5%인상에 불과한 것이다. 16일 파업돌입 직전에서 25일 파업종료까지의 과정을 당시 노조민주화파의 소식지인 ‘근로자의 함성’(11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4.16, 오전8시에 2,200여 명의 조합원이 기본급 18.7%와 제 수당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고 9시경에 파업대책위원회(10명)와 쟁의지도부, 홍보반, 후생지원부가 결성되어 9시30분에 파업이 정식 발표된다. 10시부터 12시까지 공장시위를 하고 오후 2시에 3차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다.
■4.17, 식당에서 노래와 장기자랑, 조합원 교육, 공청회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4.18, 오후에 김우중 회장이 파업을 자제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일이 있었으며 인천공장에서는 파업파괴 술책에 대항하여 현장시위가 전개되는 등 부평공장의 투쟁은 타 공장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또한 이날 사무직 직원들의 지지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19, 휴무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에 회사의 적극적인 파괴공작이 있을 것이고 회사가 휴업공고를 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저녁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의하고 오후6시경부터 350여명이 기술센터 3층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4.20, 경찰의 강제해산 움직임이 보이자 각목, 쇠파이프, 신나통, 석유로 무장하여 대비하였다.
■4.21, 새벽에 김우중과의 교섭이 있었으나 결렬되었으며 파업기간 중에 헌신적으로 지원투쟁을 전개하는 가족들에게 경찰과 회사측 사람들이 농성자들에게 들여보낼 식사를 차단하며 심한 모욕, 폭행을 가하는 것을 농성장에서 지켜본 조합원들이 격분하여 식사를 거부키로 결의했다.
■4.22~4.25, 교섭이 있었으나 결렬되고 23일 홍영표 대의원과 김우중의 단독협상이 있었다. 김회장은 임금인상이 정부,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나 최대로 양보할 것이니 타결짓자고 제의하고 농성자 대표는 지난 수년간 열악한 임금조건에 의한 생활의 어려움을 강조하면서도 김회장이 겪고 있는 외부압력 상황을 인정한다는 신축성을 보여 타결의 실마리를 찾고 24일 합의하여 25일 새벽에 김우중이 회사측 간부들과 함께 농성장에 들어와 합의서에 서명했다. 16일부터 공장시위와 농성, 철야농성, 사무직 직원들의 파업지지 성명서 등의 극적인 상황들이 벌어지면서 진행된 임금인상 투쟁이 결국 합의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써 정부의 임금동결 정책을 돌파하고 기본급 10% 등의 획기적인 성과를 확보한 대우자동차의 임금인상 투쟁은 8명 구속, 1명 해고, 1명 자진사퇴, 4명 3개월 정직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상, 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73~74쪽에서 재인용)
한편, 파업선동자로 지목된 해고자 송경평은 23일 쟁의조정법(제3자 개입금지)으로 구속되었는데, 당시 언론에서 명문대 출신의 위장취업자로 보도하기도 하였다.(조선일보, 1985년 4월24일자) 반면 파업의 원인 제공자인 김우중 회장은 “파국 막은 총수의 육탄설득”(조선일보, 1985년 4월26일자)등의 논조로 미화되어 언론 보도양태의 대조를 보였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파업투쟁은, 당시 정부의 임금억제책과 경총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넘어서는 성과를 보였을 뿐 아니라, 이후 구로동맹파업으로 연계되어 번져나가게 되는 87년 하반기의 노동자대투쟁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사건사전번호 : H-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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