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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투쟁

제목(Title) : 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0515


사건종료일 : 198506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5.05.16, 각 대학별 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 시위
-05.29, ‘광주 민주영령 및 김태훈 추모제’(서울대)
-06.07, 전학련, ‘광주사태 국민대토론회’ 개최(서울대)

<사건배경>
대학가의 광주항쟁 진상규명투쟁 또한 4?19 기념식 및 투쟁과 함께 84년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진영의 ‘5월투쟁’의 핵심이슈로 장기화하였다. 85년의 ‘5월투쟁’의 특징은, 첫째, 대학별 총학생회가 부활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의 5월 축제는 기존의 무의미한 이벤트행사에서 광주학살 진상규명 등의 정치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여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둘째, 4월17일 출범한 전학련 주도하의 학생운동진영이 80년대 초반 이래 다시 본격적으로 광주학살과 관련된 미국의 책임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광주항쟁진상규명을 위한 5월투쟁은 5월23일의 전학련 산하 ‘삼민투’의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정점을 이루게 된다. 5월16일 전개된 서울지역 대학별 진상규명요구 시위는 다음과 같다

<사건내용>
5월16일에만 서울지역의 14개 대학생 8천여명과 지방의 25개 대학생 7천여명 등 전국적으로 총 1만5천여명이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 서울지역 시위와 관련하여 경찰은 상명여대생 14명과 성균관대생 1명 등 15명을 연행했다.

■성균관대생 3천여명은 16일 밤 8시30분경 축제 마지막행사인 ‘문행대동제’를 마친 뒤 학교운동장에서 이날 간부 이원식(22, 정외과 4년)의 연행에 항의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이들 중 1천5백여명은 8시50분경 스크럼을 짜고 ‘광주사태 해명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나오려다 최루탄으로 제지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한 후 다음 날 아침 6시30분까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건국대생 1천5백여명은 16일 저녁 7시부터 밤11시까지 ‘광주사태 해명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인 후 교문 앞에서 경찰에 맞서 화염병 투척 및 횃불시위를 벌였다.
■서울대생 5백여명은 16일 저녁 8시30분경 관악캠퍼스 노천극장에서 ‘민속가면극연구회’ 주최의 탈춤공연을 관람한 뒤 ‘광주사태 진상규명’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이 밖에, 서울지역에서 교내시위를 벌인 대학은 한양대 3백여명, 이화여대 4백여명, 경희대 7백여명, 국민대 4백여명, 단국대 1백여명, 중앙대 1백여명, 외국어대 3백여명, 상명여대 2백명, 성신여대 1백50명, 숙명여대 2백명, 서울여대 2천명 등이다.(동아일보, 1985년 5월17일자) 한편, 이날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회원 및 간부 40여명도 광주항쟁 관련 성명서를 발표하며 분도회관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5월29일 서울대에서는 5백여명이 81년 5월27일 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의 퇴진을 외치며 투신 사망한 김태훈을 추모하는 ‘광주 민주영령 및 김태훈 추모제’를 개최하였다.(한국일보 1985년 5월30일자)
5월23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서울미문화원 점거로 인해 5월투쟁은 6월까지 이어졌는데, 전학련은 6월7일 서울대에서 ‘광주사태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였고 민추협, 민통련, 전남민주운동청년협의회 등이 광주사태 진상규명 요구 및 미문화원점거농성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키도 했다.


사건사전번호 : H-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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