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제목(Title) :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사건발생일 : 19850523


사건종료일 : 19850526


사건내용 : <사건경과>
-85.04.17,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발족
-05.06, ‘전학련’ 2차대회 개최(고려대)
-05.07, 삼민투위 결성(서울대)
-05.14, ‘전학련’ 3차대회 개최(연세대)
-0515~17, 대학가, ‘광주사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단’ 요구 시위 확산
-05.23, 함운경 등 73명 대학생들, 미문화원 점거농성 돌입
-05.26, 점거농성 자진해산
-07.15,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최초 공판 및 관련자 재판거부

<사건배경>
85년 5월에 접어든 학생운동에게 있어서 미문화원 점거농성투쟁은, 전학련의 출범(04. 17)이후 전개한 ‘5월투쟁’을 최종화시키는 선도적 전술이었다. 전학련의 ‘5월투쟁’은 2?12 총선 이후의 유화국면의 지속과 학생대중들의 정치투쟁의 고양에 힘입었고 더욱 상승시키도 하였다. 전학련의 정치적 자신감은 구체적으로는, 첫째, 84년 하반기부터 학생운동 내에서 제기된 ‘선도적 투쟁론’의 전국적 확산, 둘째, 80년 이후의 학생 대중역량의 축적, 셋째, 2?12 총선의 결과가 시사하는 민중들의 정권이반과 각 부문운동의 전열정비 및 투쟁고양에 힘입은 것이었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96쪽)
따라서 전학련은 광주항쟁 5주년을 맞이하여 ‘5월투쟁’을 과감히 전개할 수 있었다. 전학련은 5월투쟁 통해 광주학살의 책임 범위를 전두환의 ‘군사파쇼독재’를 넘어 미국에게까지 귀속시킴으로써 당시 금기시되던 ‘반미’의 대중화에 일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사건내용>
미문화원 점거농성에 관한 최초 논의는 전학련 3차대회(85. 5.14, 연세대)에서였다고 한다(위 자료 99쪽). 이에 대해서 점거농성에 돌입한 학생들은 보도진과의 필담을 통해, “지난 14일 각 대학 광주사태 투쟁위 책임자들이 모여 처음 계획을 세운 후 그 후 거의 매일 만나 세부계획을 짰다” 고 밝혔다. 이들은 애초에는 참여결의 인원이 96명이었으나 진입실패자 및 결석자 등의 발생으로 75명만이 행동에 참여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85년 5월24 일자).
23일 12시 5분경, 전학련 소속의 서울지역 5개대학(서울대 13명, 연대 21명, 고대 12명, 성균관대 21명, 서강대 8명) 총 75명(여학생 20명)의 대학생들은 미국문화원(USIS, 서울 중구 을지로1가 소재) 2층 도서관을 점거했으며 즉각 농성에 돌입했다. 이중 30여명은 미리 도서관에 들어와 있었으며, 나머지 인원은 조별로 비상출입문과 정문을 통해 진입했다. 점거 직후 학생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광주사태 책임에 대한 미국의 언론매체를 공개사과’와 ‘이를 위한 미대사와의 면담 및 내외신 기자회견 보장’이었다. 또한 전학련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명의의 선언문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에서 다음과 같은 ‘우리의 주장’을 통해 점거목적을 밝혔다.
“1. 광주학살지원 책임지고, 미 행정부는 공개사과하라!, 2. 미국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3. 미국 국민은 한미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라!”(『선언으로 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신동아 1990년 1월호 특별부록, 125~126쪽)
농성돌입 4시간 후인 오후 4시경, 미대사관 참사관이 학생들과 대화를 가졌다. 학생들은 “미국은 48시간전에 광주사태를 알지 않았느냐, 따라서 미국은 광주사태를 묵인한 것이므로 이를 사과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참사관은 “미국측은 광주사태를 사후에 알았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은 즉각 군병력의 철수를 한국군측에 요청했다. 따라서 광주 문제는 미국이 사과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학생들의 내외신기자회견 요청을 거절하고 미 대사와의 면담 약속을 하였다(조선일보, 위와 같은 날자). 그러나 미대사와 학생들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리고 농성 나흘째인 26일 학생들은 자진해서 농성을 해제했다. 나흘간의 전 과정을 일지형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23일
-오후 12시5분, 서울대 등 5개 대학생 75명 미문화원 2층 도서관 점거
-오후 1시, 버나드 래빈 문화원장과 학생들 대화
-오후 1시 50분, 전화단선으로 인한 보도진과 학생들과의 필담 시작
■24일
-오전 8시, 래빈 문화원장과 던롭 참사관 학생들과 대화
-오전 9시, 노신영 총리, 워커 미대사와 대책협의
-오전 11시 10분, 클리블랜드 미 부대사 학생접촉, 설득
-오전 11시 30분, 관련 5개 대 총장, 워커대사 만나 학생면담 요청했으나 거절
신민당 신기하(辛基夏) 의원 등 현장서 학생들과 필담
-오후 3시, 클리블랜드 부대사 이민우 신민당 총재 방문
-오후 6시 20분, 워커대사 학생들에게 공개서한
-오후 9시 20분, 학생 대표 함운경, 창문 열고 요구 및 주장 설명
■25일
-오전 7시 50분, 던롭 참사관 등 학생들과 5차 면담
-오전 8시 30분, 학생들, 워커대사에 답장 서한
-오전 10시 30분, 노 총리, 워커대사와 대책협의
-오후 12시 45분, 래빈 문화원장과 던롭 참사관, 학생들과 6차 면담
-오후 1시30분~오후11시, 학생들과 미국측, 연속 5차례 면담
-오후 6시 30분, 김대중, 김영삼, 민추협 통해 메시지 전달
■26일
-0시 17분, 학생들, “26일 정오에 농성풀겠다”고 발표
-오전 4시 25분, 농성학생 중 연세대 심리학과 3년 이영희(22) 탈수현상으로 서울시립 동부병원에 입원
-오전 10시40분, 미국측, “6월 18일 오후 3시 학생대표10명과 2차 회담 갖자”고 제의
-오전 11시 30분, 농성학생대표 문화원 뒤뜰에 나와 내외신 기자 8명과 회견
-낮 12시 6분, 농성해제 (이상 조선일보, 1985년 5월28일자)

농성 해제 후, 연행된 73명 중 25명이 28일 오후 구속되었고, 구류 43명, 훈방 5명으로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친미 일색이던 사회적 분위기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광주학살에 대한 당시 전두환정권의 책임거론 조차도 쉽지 않았던 시기에 미국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만큼 더 큰 선도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당황 그 자체였으며 사건의 파문을 축소시키는 데 급급했다. 민추협은 국민들의 동조적 분위기를 의식한 듯 박찬종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문화원 농성투쟁이 민주화운동상의 하나의 매듭이 될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당시 학생운동권의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인식수준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도 있다. 즉 농성투쟁 가담학생들은 ‘반미-용공좌경-소수폭도’라는 왜곡선전에 대해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는 식의 수세적 입장을 취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조직사건』, 아침, 1989, 107쪽)
한편, 학생운동 차원에서는 이 점거농성을 기점으로 반미계열 NL파의 대중적 확산이 용이해졌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85년 하반기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등 상징적 건물에 대한 선도적인 점거전술을 투쟁수단으로 활용했으며, 그 성공적 선례로 미문화원 점거투쟁을 본보기 삼았다.


사건사전번호 : H-1069


파일

H-1069.jpg

크게보기 : H-1069.jpg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