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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육’지 사건

제목(Title) : ‘민중교육’지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0817


사건내용 : <사건경과>
-85.05.20, ‘민중교육’지 발간
-06.25, 서울 여의도고 교장, 서울시교위에 ‘민중교육’지 불온성 제보
-07.16, 종로경찰서, ‘민중교육’ 출판기념회 원천봉쇄
-08.06, KBS, 특별보도 프로그램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들을 노린다‘ 방영
-08.07, ‘Y중등교사회’, ‘민중교육 집필교사 징계사건에 대한 우리의 주장’ 발표
-08.17, 김진경, 윤재철 교사 및 송기원 주간 구속(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08.23, 문공부, ‘실천문학사’ 폐간 조치

<사건배경>
‘민중교육’지는 교육현장의 문제의식을 모아 ‘Y중등교사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비정기 무크지였다. 참여교사들은 주로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교육현장의 문제를 공유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중이었고 일선교사들의 시각에서 교육문제 해결의 방안 제시를 하고자 한 것이 바로 ‘민중교육’지의 창간이었다. (서중석, 『서중석 르뽀집;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역사비평사, 1988, 114쪽) 이러한 민중교육지의 발간취지는 85년 5월 20일 출간된 창간호의 내용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민중교육’은 크게 ‘좌담’(분단상황과 비인간화교육), ‘특집’(교육의 민주화)을 중심으로, ‘창작’, ‘번역’, ‘소외된 현장의 목소리’, ‘교육시평’, ‘서평’, ‘르뽀’ 등으로 구성돼있다.(민중교육편집위원회, 『민중교육』①, 실천문학사, 1985 참조) ‘민중교육’은 게재된 글들의 치열한 현장성과 교육문제의 사회구조적 접근 등의 예리한 시각으로 출간과 동시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서중석, 같은 자료, 114~115쪽)
그러나, 83년 말 이래의 유화국면에서 터져나오는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화요구와 특히, 85년 상반기의 대우자동차 파업 및 구로동맹파업 등의 노동운동의 고양, 미문화원 점거농성과 삼민투위 사건 등은 정부로 하여금 아래로부터의 ‘비판의식’의 무서움을 깨닫게 했다. 따라서 전두환 정권은 정부 및 사회에 대한 어떤 종류의 비판의식에 대해서도 ‘좌경용공’의 딱지를 붙이려했고 이는 86년 하반기 출판?서적에 대한 마녀사냥을 본격화했다. 당시 사회비판서적을 출간하던 창비사, 실천문학사 등은 정부의 상시적인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더군다나, 83년말에서 84년 초에 발생한 Y중등교사회가 연루된 ‘교과서사건’ 또한 정부가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교사들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민중교육지 사건 배경의 또 다른 맥락은 민주화 운동 진영의 저항담론이자 저항주체의 상징성을 가진 ‘민중’이는 담론 자체에 대한 정부로부터의 공격이 존재한다. 당시 문예운동 진영 역시 ‘민중미술’, ‘민중문학’ 등의 논의를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중석, 같은자료, 114쪽) 정통성 없는 사상누각의 사이비 공화국정부에게는 민주주의 체제의 권력의 소재와 주체를 공공연화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위협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사건내용>
위와 같은 배경 하에서, 민중교육지 사건의 발단은 6월25일 서울 여의도고 교장 김재규가 서울시교위 학무국장에게 책자를 전달하고 학무국장은 그 내용에 대해 시교위 안기부 조정관에게 의뢰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윤재철, <민중교육지 사건; 교육민주화의 횃불>, 한승헌선생 회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분단시대의 피고들』, 범우사, 1994, 398쪽.) 이후 민중교육은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듯 급속히 ‘사건화’되었다. 7월16일, 출판기념회는 종로경찰서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7월18일, 시교위는 관련 교사들을 소환했으며, 7월22일에는 유상덕, 김진경 교사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8월5일, 문교부 또한 언론을 위한 친절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민중교육은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 ▲기존의 교육제도와 학설은 물론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가치관을 전면 부정하고 ▲민중을 계급투쟁의 주체로 내세워 혁명적 방법으로 현존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급진좌경주의자들의 투쟁이념인 민중교육론을 대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서중석, 『서중석 르뽀집;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역사비평사, 1988, 116쪽) 정부쪽에서 가장 문제 삼았던 게재 논문은, ‘교육의 민주화’라는 특집에 편성된 김진경의 ‘해방후 지배집단의 성격과 학교교육’과 윤재철의 ‘교육현장, 그 민주적 해방’이었다.
당시 관제언론인 KBS와 MBC 또한 관련 교사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가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특히 KBS는 8월6일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들을 노린다’는 제목의 특별보도프로그램을 방영하여 민중교육을 삼민투의 주장과 유사하다고 몰고 갔다.(윤재철, <민중교육지 사건; 교육민주화의 횃불>, 한승헌선생 회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분단시대의 피고들』, 범우사, 1994, 398쪽).
이러한 다각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8월7일까지는 20여명 선의 파면으로 사건이 종료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8일부터 검찰의 형사처벌방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10일 유상덕, 고광헌 교사 등 6명이 자진출두했으며, 11일에는 연행교사 5명이 구류처분되었고, 결국 8월17일에는 김진경, 윤재철 교사와 실천문학사의 송기원 주간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86년 2월 중순 서울지법에서 김진경은 1년6월, 윤재철과 송기원은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송기원 주간의 구속 이후 실천문학사는 폐간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법적 공세는 역설적으로 비민주적인 통제주의 교육정책을 스스로 드러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사들의 해고와 구속조치는 관련 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재야단체들까지 가담하여 항의의 연대를 만들어내었다.(서중석, 『서중석 르뽀집;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역사비평사, 1988, 118~119쪽). 이후 관련 교사들이 소속되어 있던 Y중등교사회는 초기 교원노조운동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교사들 또한 교육민주화운동의 중심주체들이 되었다.


사건사전번호 : H-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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