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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영(경원대생) 분신사망사건

제목(Title) : 송광영(경원대생) 분신사망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0917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58년 10월 3일 전남 광주 출생
1974년 2월 서울 경신중학교 졸업
1975년~76년 청계노동조합 활동
1976~1979년 인천에서 신문팔이 및 Y셔츠장사 등에 종사
1979년 방위병 입대
1982년 8월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1984년 경원대학교 법학과 입학
1984년 2학기 실존주의 철학연구회 창설
1985년 1학기 경제문제연구회 창설
1985년 9월 17일 군사독재에 항거, 분신
1985년 10월 21일 새벽 1시 45분경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사건배경>
85~86년에 분신투쟁을 선택한 열사들 중 홍기일(85.08.15), 이재호(86.04.28), 강상천(86.06.06)의 공통점은 각자의 고향이 광주를 위시한 호남지방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장기에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광주학살의 기억은 청년기까지도 쉽게 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는 과거의 것만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송광영 역시 분신투쟁을 통해 85년 정부의 학생운동 탄압정책으로 기획된 ‘학원안정법’을 철폐시키고 광주학살의 책임자들을 온몸으로 고발하고자 했다.

<사건내용>
5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셔왔던 열사는 집안형편과 수험준비를 위해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84년 9월 법학과 어용교수 문제로 시위를 주도하면서 시작된 송광영의 본격적인 활동은 1, 2학년 때 ‘실존주의철학연구회’와 ‘경제문제연구회’등을 창설하면서 활발해졌다. 남달리 전태일, 김종태 열사들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그는 특히 85년 8월15일 홍기일의 분신사건에 대해 동향인으로서, 같은 노동자로서 충격을 받았었다. 이후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 ‘일이 잘 안되면 최선의 방법으로 분신자살을 택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미 1학년 농활 직후 시위를 주도하여 수배상태였던 그는, 85년 9월17일 학생총회가 있는 날을 거사일로 택했으나 우천으로 총회가 연기된 상태에서, 시위를 주동하며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고 뛰어나가 “학원악법 철폐하고 학원탄압 중지하라”, “민중생존권 수호하고 독재정권 타도하자”,고 외쳤으며 달려온 직원이 소화기로 불을 끄자, “군부독재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라” 고 외치며 주위의 학우들에게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병원에 옮겨진 그는 10월21일 새벽 사망했고 당시 경찰의 방해로 장례식도 못 치른 채 금촌 기독교인 묘지에 묻혔다.(이상,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6년도 인권주관 자료집』,1986, 110~120쪽)
<삶과 죽음> (http://ugh.or.kr/hacksang/hacksang4.html#송광영)
1985년 9월 17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분신을 한 송광영 동지는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질주하다 쓰러졌다. 9월 18일 병상에 찾아온 민주인사와 학생에게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말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라며 투쟁을 독려하였다. 10월 21일 새벽에 운명하였고, 학교에서는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분향소를 설치하지 못하고 장례식 또한 경찰의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하였다.


사건사전번호 : H-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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