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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

제목(Title) :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 : 깃발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1029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4.10.07, ‘민추위’ 결성(검찰 추정 발표)
-10.12, 서울대 민주화투쟁위원회(민투) 결성
-11.03,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투학련) 결성(연세대, 학생의 날 기념연합집회)
-85.07.18, 주요 간부 구속
-10.29, 검찰, 민추위사건 발표
-10.11, 민추위 관련 수배자 우종원 사망(추정일)

<사건배경>
83년 말에서 84년 초에 취해진 정부의 유화조치는 학생운동 및 민중운동에게 일정한 전술변화를 취하게 하였다. 그것은 유화국면의 정세가 조성하는 새로운 정치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였으며, 학생운동은 과거의 비합법투쟁을 뛰어넘는 새로운 합법?반합법의 대중선동선전 전술을 모색했는데 그러한 대담한 시도중의 하나가 바로 ‘민추위’였다. 이에 따라 민추위가 설정한 기본조직모형은 ‘학생회(합법 대중조직)-투쟁위원회(반합법 선도적 투쟁조직)-민추위(비합법 전위조직)이었는데, 이러한 3단계의 조직모형은 이후 최소한 80년대 후반까지 학생운동의 기본조직모형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민추위 사건이 일명 ‘깃발’ 사건으로 불리게 된 것은, ‘민추위’가 학생운동의 노선방침에 대해 기술한 자신들의 팜플렛의 제목을 ‘깃발’이라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팜플렛 ‘깃발’은 84년 가을에 두 번 발간된 후 중단되었는데, 배포 즉시 변혁운동의 전술관, 조직관, 대중관 등을 둘러싸고 학생운동 내에서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를 흔히 ‘깃발논쟁’이라 하였다. 민추위는 ‘깃발’을 통해서 첫째, 변혁운동진영 내에서의 ‘전위주의’의 정립의 필요성, 둘째, ‘개량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주의’의 정당성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많은 학생운동가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민추위의 정치팜플렛 ‘깃발’은 조직원들을 확대시키는 유용한 방편이 되었는데, 민추위의 지도부는 애초부터 조직화 수단으로서의 깃발을 상정하고 있었다고 한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조직사건』, 아침, 1989, 103쪽)

<사건내용>
■정치노선
검찰은 85년 10월 29일 ‘민추위’ 사건의 발표에서, 이례적으로 조직사건에 붙어다녔던 ‘북한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민추위를 ‘북괴와 직접 관련 없는 일종의 자생적 사회주의자집단’이라고 규정했다.(조선일보, 1985년 10월30일자) 그러나, 검찰은 민추위의 기반노선은 “북괴주장이나 이론에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용공이적단체’로 몰아가고자 했다. 더불어, 검찰은 민추위의 많은 강령 및 행동지침 등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정책실에서 논의됐고 체계화되었다며, 민청련 의장인 김근태를 민추위의 배후조종자로 지목했다.
민추위는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각각의 개별적 부문운동이 아닌 전체 혁명운동의 일 주체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장하고 그에 따른 전략전술을 구체화했는데 그것이 NDR(민족민주혁명)노선이었다. 민추위의 NDR노선의 제기는 이후 변혁의 목표와 중심 주체를 둘러싸고 ‘C-N-P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삼민투와 CA진영의 기본노선틀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NDR의 변혁이론 하에서 민추위는 ‘광주항쟁’과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재평가에서 개량주의 및 기회주의에 대한 경계와 전위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상의 오류들은 우리 운동에 다음과 같은 과제를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첫째, 운동의 주도권은 결코 기회주의적 정치가에게 맡겨서는 안된고 민주운동의 주도체가 장악해야 한다는 점. 이는 투쟁을 통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위조직의 부재를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해야 하는가 라는 과제를 제기하였다.”(깃발 2호 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조직사건』, 아침, 1989, 101쪽에서 재인용)
■조직체계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민추위의 조직체계는 위원장 문용식 아래 크게는 ‘노투’(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투’(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홍보위원회), ‘연락책’ 등 4개의 주요 산하기구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임무는, 민투가 선도적 정치투쟁을, 노투는 민중지원투쟁을, 홍보위는 대중선전선동 및 노투? 민투의 활동보조를, 연락책은 대학간 연대활동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투는 검찰이 발표한 민추위의 결성 이전인 84년 상반기부터 ‘민중생활조사위원회’라는 형태로 활동하고 있었다.(깃발 2호 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조직사건』, 아침, 1989, 99쪽) 또한 한편, 특히 민투는 84년 10월 12일 서울대에서 결성된 이후 연대, 성대, 고대에서도 결성되어 84년 11월3일 학생의 날 기념연합집회에서는 이들 4개대학 민투가 주축이 되어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투학련)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주요활동
위와 같은 민추위의 노선과 조직이 본격화되자 당시 학생운동진영 내에서는 민추위의 ‘선도투쟁’, ‘노학연대’, ‘전투소조’, ‘민지투’(민중지원투쟁), ‘삼민투’ 등의 유행어가 만들어졌다. 민추위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분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선도적 정치투쟁’. 84년 9월초 전두환의 방일을 앞둔 즈음 ‘반일반전(反日反全)투쟁’을 매개로 한 반독재민주화투쟁 외에 민추위가 자신의 선도투쟁 노선을 각인시킨 사건은 11월 14일의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투쟁이었다. 민추위의 외곽조직격인 민투학련 소속 264명의 대학생들은 ‘노동악법개정’, ‘전면해금 실시’ 등을 요구했다.
둘째, ‘총선투쟁’. 민추위는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총선투쟁지침’이라는 팜플렛을 작성하여 구체적인 총선투쟁의 방향을 밝혔는데, 그 요지는 야당과의 연대를 포함하는 제반 부문운동간의 연대를 구축하며 대중적 관점에 맞는 슬로건으로 적의 의도를 분쇄하고 대적 정치의식의 고양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의 총선투쟁은 민추위의 이름이 아닌, ‘전국대학연합선거대책위원회’(선대위), ‘민주총선쟁취학생연합’, 민정당재집권저지투쟁연합 등의 반합법투쟁조직의 명의로 진행되었다. 선전, 집회, 가두시위 등이 이어졌고 선거직전에는 각 유세장에서 반민정당?군부독재 재집권결사반대?민중생존권 보장 등의 주장으로 신민당의 돌풍에 일조를 하기도 했으나 야당에 치우친 우편향적 전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셋째, ‘민중지원투쟁’(민지투). ‘민조위’를 전신으로 하는 ‘노투’는 민중지원투쟁을 담당하였는데, 이는 80년대 후반 이래 학생운동의 ‘노학연대’의 원조개념이라 할만했다. 학생운동의 관념적인 민중지향성을 뛰어넘는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민중연대가 민중지원투쟁의 지향성이었다. 이에 따라 노투는 기존의 시내중심의 거리시위를 벗어나 가리봉 5거리 등 공단주변에서의 거리투쟁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84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민지투는 9월9일?10월12일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에서, 10월26일 가리봉 5거리에서의 노동악법개정투쟁, 27일 구로공단?부평역 시위로 이어졌고, 85년에 상반기에 들어서면 구로 성원제강 지원투쟁, 목동빈민지원투쟁, 메이데이 노학연대 가두시위에서 구로동맹파업 연대투쟁으로까지 발전했다.
■수사과정
85년 하반기, 위와 같은 민추위의 정치투쟁과 노학연대투쟁은 정부로 하여금 ‘노동현장의 학원화’를 우려케 했다. 민추위는 위기의 정부에게 먹음직스런 먹이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정권유지에 좌불안석하는 독재정권의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한 불법적인 고문과 가혹행위는 필수코스였던 것이다.
민추위 수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조직사건』, 아침, 1989, 109쪽) 즉, 삼민투 수사가 노투로 이어지고 노투 조직책이 잡히자 민추위 주요간부가 대거 체포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8월말 위원장 문용식이 체포되는데, 사건은 이제 민추위의 배후조종인물로 맞추어지고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과 이을호 정책실장이 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민추위의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고문 및 불법행위는 첫째, 미검거자 및 수배자의 완전검거, 둘째, 최후 배후조종자에 대한 추궁, 셋째,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김근태의 자백강요 등 세 가지 계기들 때문에 어느 사건에 비해서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배중이던 민추위 홍보위 산하 ‘학외유인물책’ 우종원이 의문사하였고, 박종철은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민추위 민투 산하 조직책)의 소재 추궁과정에서 고문으로 살해되었다. 당시 조직사건의 조작적 성격상 ‘수괴’와 ‘배후조종자’ 의 실체가 중요했기 때문에 특히, 문용식과 김근태는 비인간적인 집중적 고문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문용식은 김근태 8차 공판에서 당시의 수사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체포되었을 때 수사의 초점은 삼민투를 조직하라고 지시한 사람, 미문화원사건을 지시한 사람….즉, 배후가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그들은 저를 고문대인 칠성판 위에 묶어놓고 물고문을 하며 ...‘김대중을 만나 지시를 받았지?’, ‘장기표를 만나 삼민투를 조직하라고 지시받았지?’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며 고문을 가했습니다. ...고문을 받다 실신하고 똥물까지 게워낸 후 하루가 지나 담당 수사관이 와서 ‘김근태를 만났지? 지시를 받았지?’ 라고 물었을 때, ‘네, 만났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큰 사건-미문화원사건, 삼민투사건 등-을 중심으로 김근태의장과 만난 날짜를 잡고 조서를 꾸몄습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10쪽에서 재인용)
김대중, 장기표, 김근태 그들의 당시 야당 및 재야 민주화운동에서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경찰은 충분히 배후조종자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민추위의 ‘배후조종자’가 될 운명의 짐을 진 김근태에게 가해진 고문이 최소한 문용식보다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검찰과 언론은 김근태에게 물리적 고문 이상의 인격적 모독을 가하고 있었다. 검찰수사자료는 김근태에게 ‘운명지워진 적색분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 흔적을 보여준다. 김근태와 관련하여 당시 한 일간지는, “이 같은 그의 사회주의운동에로의 탐닉을 당국은 그의 성장환경과 연관지어 분석했다. 김씨는 위로 세형과 숙부 숙모 외숙모 외사촌형 등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이 월북하거나 처형된 주변환경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월북가족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냉대와 가난에 찌든 생활 등으로 어려서부터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혐오감과 저항의식을 지녀왔으리란 것이 당국의 분석이다.” 라고 해석했다.(조선일보, 1985년 10월30일자)
결국, 85년 12월19일,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 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기독교인권운동을 중심으로』,1987, 2249~2251쪽에서 재인용)


사건사전번호 : H-1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