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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헌법 쟁취투쟁

제목(Title) : 삼민헌법 쟁취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1029


사건종료일 : 19851122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5.10.29, 서울시내 6개대생, ‘삼민헌법쟁취위원회’ 발족
-11.07, 기청협, ‘반군부독재민중민주헌법쟁취특별위원회’ 발족
-11.12, 노동부 수원지방사무소 점거
-11.13, ‘고 전태일 동지 15주기 추도식 및 파쇼헌법철폐와 삼민통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실천대회’
-11.20, 재야 23개 단체, ‘민주헌법쟁취위원회’ 발족
-11.22, ‘파쇼헌법철폐를 위한 범국민대토론회’(서울대)

<사건배경>
85년 하반기 학생운동의 투쟁방향은 시기별로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7~8월, 민중민주운동 탄압저지와 학원안정법제정 저지투쟁
② 9월, 전학련?삼민투의 재건 등 내부정비
③ 9월말~10월중순, IMF?IBRD투쟁과 관련한 민족사수권 수호투쟁
④ 10월말 이후 수입개방반대투쟁 및 삼민헌법 쟁취와 파쇼헌법 철폐투쟁(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122~123쪽)
이중, 특히 학생운동의 전학련은 삼민헌법쟁취투쟁을 위해 산하에 ‘삼민헌법쟁취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이는 노동운동진영의 서노련이 헌법투쟁시기 군부독재타도의 핵심전술로 설정했던 민중?민주?민족통일의 삼민헌법쟁취를 학생운동이 수용했으며 양 진영간에 기초적 수준에서나마 조직적 공동행동이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대 진영간의 전술설정과 공동실천의 공조는 적어도 86년 5?3 인천사태 이후 서노련의 와해와 직선제개헌-헌법제정민중회의소집-제헌의회소집 등 전술방향의 차이로 인해 학생운동이 분열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85년 11월20일 민통련 등이 주축이 된 재야운동 또한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헌법투쟁의 한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사건내용>
85년 10월11일, 서노련 중심의 ‘전국노동자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는 전학련과 공동주최로 IMF?IBRD 서울총회에 맞추어 ‘미국의 경제침략 규탄과 외채정권타도를 위한 범민중 궐기대회’를 개최한 후 대림시장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전학련의 삼민헌법쟁취투쟁은 1985년 10월29일 연세대, 이화여대 등 서울 지역 6개 대학별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의 발족 및 ‘삼민헌법쟁취실천대회’의 개최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이후 선도투쟁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11월12일 전학련 중부지역 산하 ‘삼민헌법쟁취범국민투쟁위원회’ 소속 서울대, 한신대, 성대 등 3개 대학생 25명은 노동부 수원지방사무소를 기습점거하고 ‘삼민헌법쟁취’, ‘재벌헌법타도’, ‘미국의 수입개방반대’, ‘농가부채탕감’ 등을 요구했다(동아일보, 1985년 11월12일자). 전태일 열사 15주기인 11월13일, 전학련과 서노련의 공동주최로 전개된 제기동 일대의 가두시위에서는 “독재헌법철폐”,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중?민주?민족통일 헌법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중심으로 투쟁을 벌여나갔다.
삼민헌법쟁취투쟁은 또한 파쇼헌법철폐투쟁과 전술상의 동일선상에서 전개되었는데, 11월21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서울지역 10여개대생 2천여명은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파쇼헌법철폐를 위한 범국민토론회’를 개최하고 교내시위를 벌였다. 이 토론회에는 가택연금 신분의 한영애 신민당 인권국장, 김병오 민추협 부간사장 등이 참석하여(한국일보, 1985년 11월22일자) 재야 및 야당 또한 86년, 87년의 헌법투쟁기에 앞선 전열정비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노련과 전학련의 헌법투쟁기의 삼민헌법쟁취 노선은 이후 직선제 민주헌법쟁취론,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론 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학생운동 및 재야운동 내에 헌법투쟁과 관련된 논쟁을 촉발시킨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삼민헌법쟁취투쟁은 86년부터 전국적으로 불붙어 오르기 시작하는 민주화열망과 범국민적 개헌서명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사건사전번호 : H-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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