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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상공회의소 점거사건

제목(Title) : 서울미상공회의소 점거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51104


사건내용 : <사건경과>
-85.11.04, 서울지역 7개대생, 서울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사건배경>
85년 하반기의 학생운동진영에 유행한 투쟁전술은 ‘점거농성전술’이었다. 84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민추위의 선도적 정치투쟁론은 정파를 불문하고 일정하고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고,
5월23일 전학련?삼민투의 미문화원점거농성은 반미투쟁의 필요성과 그 효과를 인식케 해준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 이후 4개여월만의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은 학생운동에게는 자연스런 것이었고 또 그만큼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도적’인 점거농성은 같은 날 두 가지의 투쟁과 병행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전학련 주최의 대중집회 형태로 거행된 ‘미국에 대한 공개질의서’ 채택 및 미국상품화형식‘ 이고 다른 하나는 ’수입개방반대‘를 요구했던 고대생들의 새마을중앙본부 시위농성이었다. 같은 날 동시에 진행된 세 가지 투쟁은, ’대중투쟁-선도투쟁의 결합‘이 당시부터 학생운동의 투쟁노선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케 해준다.
미 상공회의소는 당시 미 레이건 행정부의 이중적인 대외경제정책에 항의하고 속수무책인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했고 대외시장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수입개방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슈의 기본적인 성격상 미문화원 점거가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면, 미 상공회의소 점거는 한국 민중의 생존권, 내지는 ‘민족경제수호’ 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때 마침 10월의 IMF?IBRD 서울총회를 맞이하여, 종로, 남대문 일대에서 전학련 주최의 가두시위(9월27일)을 시발로 10월7일 서울대에서 개최된 ‘군부독재타도, 민족자주쟁취, 민중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전학련 제1차 투쟁선언대회’는 서울지역 2,000여 대학생이 참여한 투쟁이었다. 이어서 8일에는 영등포 신길동에서 전학련 남부지역 평의회 800여명의 가두시위를 비롯하여 서울지역 12개대 2,500명, 지방 5개대 900여명이 ‘민족팔아 헛배 채운 군부독재타도’, ‘종속경제타파’ ‘한국경제 압살하는 미?일 자본축출’ ‘IMF?IBRD 서울총회 결사반대’ 등을 주장하며 교내,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미국의 경제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대중투쟁이 무르익고 있었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122쪽)

<사건내용>
85년 11월4일 오전11시경, 서울대 등 서울시내 7개대생 14명은 미국상공회의소 서울 사무실(The America Chamber of Commerce in Korea)을 점거하고 ‘미국의 수입개방요구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다 2시간 5분만에 경찰에 전원 연행되었다. 학생들은 농성도중 주한미대사와의 면담 및 기자회견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 경찰이 진입하면 갖고 간 라이터용 기름통에 불을 붙여 분신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 사무실 안으로 물을 뿌리며 진입했는데, 연행과정에서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학생들이 미상공회의소를 점거지로 선택한 이유는 그 상징성 때문이었다. 미상공회의소는 국내에 진출한 미국기업들의 이익단체였다. 당시 회원수는 6백6명이었는데, 이중 기업회원은 2백33명이고, 그외 미국은행 지점과 학교, 협회, 종교단체들이 회원으로 가입해있었다. 국내에서의 활동은 주로 분과별위원회로 벌이는데, 지적소유권그룹, 은행그룹 외에 세금-노사문제, 대정부 문제, 운송, 군사 등 기능별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미상공회의소를 수입개방 강요의 전위대로 인식했던 것이다. 또한 원래 미대사관, 미문화원, 상공회의소 3곳 중 하나를 고르려 했는데, 경비가 제일 허술한 상공회의소를 택했다고 한다. (이상, 조선일보, 85년 11월5일자 재구성)


사건사전번호 : H-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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