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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신흥정밀 노동자) 분신사망사건

제목(Title) : 박영진(신흥정밀 노동자) 분신사망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60317


사건내용 :
<약력> (추모연대 홈페이지 : http://ugh.or.kr)
1960년 4월 9일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배문 중학교 중퇴 후 어렵게 생활
1984년 1월 ㈜동도전자에 입사
7월 ㈜동일제강에 입사
1985년 9월 18일 ㈜신흥정밀에 입사
1986년 3월 17일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외치며 분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사건배경>
86년 상반기 노동운동은 서울 구로지역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돼간 전국적인 임금인상투쟁의 열기로 고무되어있었다. 서울의 대한광학, 오트론, 삼성, 신흥정밀, 삼경, 인천의 이성전자. 코스모스, 남일금속, 선창산업, 성남의 콘티, 안양의 국제전기, 화천프레스, 군산의 세풍합산, 부산의 동양고무 등이 대표적인 투쟁사업장이었다.(김장한 외,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조국, 1989, 94쪽). 그 중에서도 신흥정밀은 임금인상투쟁과정에서 박영진 열사의 분신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박영진 열사의 분신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던 회사측과 회사편에 서서 일방적 탄압을 가하던 경찰에 대한 분노의 폭발에 다름아니었다.

<사건내용>
구로구 독산동 소재의 샤프심 제조업체인 신흥정밀의 임금 및 근로조건은, 초임 3,080원, 9시간의 기본근무시간 강제, 기본수당의 미지급 등 열악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초임 4,200원 인상, 기본근무시간의 정상화, 강제잔업 및 특근폐지,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3월7일부터 지속적인 유인물 작업을 하고 있었다. 3월17일 박영진을 포함한 8명의 노동자가 점심시간을 활용해 식당에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계획했으나 이를 미리 눈치 챈 회사는 점심시간을 변경하여 박영진 일행만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곧이어 들이닥친 관리자, 경찰들이 식당에 진입하자 박영진은 경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분신하였다.(김장한 외, 같은 자료, 94~95쪽) 분신 후 박영진은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8일 새벽 3시10분경 사망하고 말았다. 박영진의 운명을 지켜보러 온 동료 근로자, 도시산업선교 실무자, 민통련 간부 등 30여명은 밤새워 시신을 지켰으나 18일 아침 9시50분경 경찰이 병원으로 진입하여 이들을 연행하였다. 이후 박영진의 시신은 영안실로 옮겨졌으며 병원은 경찰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었다. 경찰은 조문객의 강제연행에 만족하지 않고 장례위원회의 장례식을 방해하기 위해 시신을 탈취하여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한국기독교교협의회 인권위원회, 『1986년도 인권주관 자료집』, 1986, 113~114쪽).
‘한국기독교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위원회’는 박영진의 분신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여, “(박영진의 행동은) 최소한의 생존조건에도 못 미치는 극한적 상황을 개선하려는 인간적 몸부림이었으며 사회적 무권리 상태에 놓인 노동자로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같은 자료, 114쪽)고 하며 박영진 열사의 분신의 의미를 온당하게 평가했다.
<삶과 죽음> (http://ugh.or.kr/nodo/nodong3.html#박영진)
동일제강 민주노동조합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 중 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가 공권력이 투입되자 경찰과 회사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병원에서도 "전태일 선배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경찰은 동지의 시신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협박, 화장을 감행하여 한줌의 재로 변해 인근 야산에 유해를 뿌렸으나 그 직후 동료들이 수거하여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사건사전번호 : H-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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