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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

제목(Title) :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60515


사건내용 : <사건경과>
-85.08.25,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출범
-09.07, ‘서노련신문’ 창간
-10.11, ‘미국의 경제침략 규탄과 외채정권 타도를 위한 범민중궐기대회’ (전국학생회연합과 공동주최, 대림시장 앞 가두시위)
-10.22, 정부, 서노련과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불법단체’ 해산명령(‘사회단체등록에관한법률’ 및 ‘광고물 관리법’ 등 적용)
-11.13, 전태일 열사 15주기 제기동 가두시위
-11.18, 생활임금쟁취위원회 결성
-86.03.10, 86임금인상투쟁전진대회
-03.19, ‘모세미용실 점거사건’(가리봉 5거리 가두시위)
-03.23, 박영진 열사 장례식 투쟁(전태일기념관)
-03.24, 주안6공단 가두시위
-04.12, 부평역전 가두시위
-05.01, ‘노동자해방투쟁의 날’ 가두시위(철산리)
-05.03, 5?3 인천투쟁
-05.15, 서노련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용공이적단체’에 대한 국가보안법, 집시법, 소요죄 적용)
-05.30,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농성사건
-06.29, ‘6?24 구로연대투쟁 계승 및 서노련탄압 규탄대회’ 개최

<사건배경>
‘서노련 사건’의 관련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서노련의 결성과 활동 자체의 노동운동사적 맥락 속의 고찰이 하나이고, 둘째, 서노련에 대한 국가권력의 탄압 및 와해기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선, 80년대 중반경의 정치적 노동운동의 흐름 속에서 서노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국적인 노동운동 지도조직을 지향한 전민노련의 와해 후, 83년 말의 유화국면 이전의 탄압상황은 거대조직을 지양하는 학습써클 중심의 소그룹운동론이 노동운동 내에 하나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게끔 했다. 그러나 84년 이후, 정세상 노동운동에 유리한 유화국면이 조성되고, 70년대 민주노조운동 활동가들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설립되고, 청계피복노조가 복구되었으며, 85년 5월 구로동맹파업이 발생하면서, 노선상 전민노련 흐름의 노동운동진영은 기존의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조직활동 방식을 벗어나 공개적이고 본격적인 노동자 대중정치활동을 위한 노동자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서노련이 표방한 조직모델은 대중정치조직(Mass Political Organization)이었다.
“서노련은 ‘노동조합’이란 말이 오염되어 있음을 잘 알고,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이란 말을 쓰지 않고 노동운동연합이란 말을 그 명칭으로 썼던 것입니다. ‘대중적 노동운동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입니다....(중략)...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적 요구뿐만 아니라 정치적, 제도적 활동을 함께 펼쳐 나가야 된다는 것은 노동운동의 상식입니다.”(김문수, 『노동자가 주인되는 참 세상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29-130쪽에서 재인용)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경제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존 어용노조와 대별되는 민주성과 전투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적 틀로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조직’의 지향이 서노련의 주된 조직노선이었다. 그리고 서노련의 출범은,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에서 드러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고양 및 대중적 연대투쟁의 활성화라는 고무된 노동현장의 상황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이기도 했다.
둘째, 당시의 정세상황 속에서 서노련에 대한 국가권력의 탄압기도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정부는 인천 5?3 사태를 계기로 86년말에서 87년 초까지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를 ‘좌경?용공의 폭력집단’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중 재야단체의 대표체격인 민통련과 전투적 노동운동의 결집체인 서노련은 집중적인 타겟이 되었다. 이런 서노련에 대한 집중적 탄압의 배경에는 85년 말부터 서노련이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삼민헌법’쟁취 투쟁이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정부는 서노련 수사에 군수사기관인 보안사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사건내용>
1985년 8월25일 서노련의 결성은 세 가지 흐름의 정치적?조직적 결합이었다. 첫째, 전민노련에서 민추위로 이어져 오던 노동계급 중심의 정치적 목적의식성을 강조하는 학생운동의 노선경향과, 둘째, 청계피복 노조 등의 70년대 이래의 민주노조운동의 흐름, 셋째, 때마침 대우어패럴을 중심으로 구로동맹파업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구로공단 및 인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고양의 정세 등의 세 가지 요인이 서노련의 결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서노련은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부흥사 등 구로동맹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노동자연대투쟁연합’, 청계피복노동조합, 경인지역 노동운동가들의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민주노조운동의 성원제강, 한국음향으로 결성된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 4개 단체의 결집체의 형태로 구성되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대중정치조직을 지향하는 서노련은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의 고양에 활동의 주안점을 두고 거기에 경제투쟁을 결합하였다. 그것은 출범이래 86년 상반기까지 ‘삼민헌법’과 ‘생활임금’ 쟁취투쟁으로 드러났다. 서노련의 이러한 양대 투쟁의 축은 85년 9월7일 발간이래 서노련의 입 역할을 한 ‘서노련신문’을 통해 전달되었다. 창간사에서 위원장 민종덕은 관제언론에 대항하는 서노련신문의 대안언론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은 우리 노동자들이 신문이나 책을 보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정치?경제?문화 등 사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은 자기네 지배자 양반들끼리 알 일이지,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고 우리를 세뇌시킨다.....KBS, MBC 등..... 관제언론은 저들 가진 자들의 수단일 뿐....우리는 진실을 밝혀주는 ‘우리 노동자의 신문’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서노련신문』은 진실을 밝히는 등불임과 동시에 억압받는 모든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정한 ‘민중의 대변지’가 되기 위해 분투 노력할 것이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23쪽에서 재인용) 서노련은 서노련신문 3호(10월9일자)를 통해 ‘삼민헌법쟁취’의 의의를 선전하며 이를 위해 산하에 ‘전국노동자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김문수는 삼민헌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민=민중?민주?민족통일’이란 ‘참된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이 ‘참된 민주주의’란 모든 독재자들이 역사적으로 자신의 독재를 숨기거나 속이기 위하여 민주를 소리 높여 왔던 것을 생각하면 민주란 말이 오염, 왜곡되어 본래의 뜻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독재자들이 쓰는 민주, 곧 가짜 민주와 구별하기 위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김문수, 『노동자가 주인되는 참 세상을』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24쪽에서 재인용.) 즉, 서노련의 삼민헌법쟁취 투쟁은 그 자체로 보았을 때는 원리상 민주주의의 복원 및 실현을 의미하며, 당시 정세와 맞물려 지향해야할 헌법의 기본정신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서노련은 이러한 투쟁의 의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주로 선도적 투쟁방식을 선호하였다. 85년 10월11일, ‘전국노동자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는 전학련과 공동주최로 IMF?IBRD 서울총회에 맞추어 ‘미국의 경제침략 규탄과 외채정권타도를 위한 범민중 궐기대회’를 개최한 후 대림시장 앞에서 가두시위를 조직하고, 전태일 열사 15주기인 11월13일, 제기동 일대의 가두시위에서는 “독재헌법철폐”,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중?민주?민족통일 헌법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서노련의 선도적인 삼민헌법쟁취 노선은 이후 직선제 민주헌법쟁취론,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론 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학생운동 및 재야운동 내에 헌법논쟁을 촉발시킨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삼민헌법쟁취투쟁이 서노련의 대표적인 정치투쟁이었다면, 생활임금쟁취투쟁은 서노련에게 있어 경제투쟁이자 정치투쟁의 일 계기였다. 생활임금은, 당시 어용적 성격의 한국노총과 전경련이 산출한 최저임금을 거부하고, 8시간노동의 대가로 생계가능한 임금을 쟁취하자는 것이었으며 일급 6,300원을 생활임금으로 책정하고 현실적 목표로 4,000원대의 일급쟁취를 설정하였다. 다음은 생활임금쟁취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의의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올해(86년-필자 주)의 임금인상투쟁은 개별 기업주를 상대로 ‘조금 더 많이 따내기’가 아니다. 일천만 노동자의 요구로서 생활임금제를 쟁취하고 온갖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는 저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와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전국의 일천만 노동자여! 8시간 노동제와 생활임금제를 노동자 손으로 쟁취하자. 사장 멋대로인 강제잔업, 철야를 거부하고 8시간만 일하고 퇴근하자. 전 자본가와 정부 맘대로인 저임금을 깨부수고 생활임금으로 주인답게 살아가자.” (서노련,『생활임금 쟁취를 위한 우리의 선언』중, 86년 3월17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26쪽에서 재인용.)
86년 봄, 생활임금제 쟁취투쟁은 한쪽에서는, 구로공단의 나우정밀, 삼경복장(코오롱), 대한광학, 롬코리아, 남성전기, 부천의 경원기계, 경남창원의 통일산업 등 개별 노동현장에서의 임투 목표로 제기되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선도투쟁의 방식으로 같은 해 3월10일, ‘86 임금인상투쟁전진대회’, 3월23일, 박영진 열사 장례식 투쟁, 3월19일, 가리봉5거리의 ‘모세미용실 점거사건’ 등으로 정치화되었다. 그러나 서노련의 치열한 전투성과 선명해 보이는 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노련과 거리를 유지하던 소그룹들은 전술목표와 대중의식 및 대중투쟁과의 거리감 등을 이유로 서노련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5?3 인천사태는 서노련의 와해로까지 이어지는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당시 서노련은 신민당 개헌현판식 집회를 삼민헌법쟁취투쟁의 중요한 계기로 인식하고 이를 위한 선전 및 선동활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5?3 사태의 주요 배후세력으로 서노련을 지목하였고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 반민주악법을 적용하며 심지어 군수사기관인 보안사까지 동원하는 등 서노련을 일망타진하고 와해시키려 했다. 당시 김문수의 증언을 통한 보안사의 역할과 잔인한 고문실상은 다음과 같다.
“1986년 5월6일 저는 분명히 민간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군수사기관인 국군보안사령부에서 수사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20여명이 고문실에 몰려 들어오거나 번갈아 들어오면서 방의 전기불을 모두 꺼서 깜깜하게 만든 후.....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하였읍니다....고문 중 몇번이나 까무라치고.....구급차에 실려 국군통합병원에 실려 가 전신 엑스선 촬영을 하고.....안티프라민과 뜨거운 물로 찜질을....소변에는 피가 섞여 나오고 배에는 전기고문으로 붉은 반점이 수십개씩 생기고...모든 살갗이 터져 앉지 못하고 눕거나 엎드려 있어야 했습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문용식 외 정리,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133쪽.)
이런 고문수사를 통한 핵심 관련자들의 구속은 위에서 언급한 서노련 내외부의 노선비판 및 분열조짐과 함께 조직의 자연스런 와해의 요인이 되었다.


사건사전번호 : H-1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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