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부천서 성고문 진상폭로 및 법정투쟁

제목(Title) : 부천서 성고문 진상폭로 및 법정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60606


사건종료일 : 1989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6. 06.04, 피해자 권인숙 부천서 연행
-06.06, 가해자 문귀동 1차 성고문
-06.07, 문귀동 2차 성고문
-06.16, 권인숙, 교도소 송치 후 수감자들과 함께 문귀동 구속 등 요구 단식투쟁 돌입
-07.03, 권인숙, 인천지검에 강제추행혐의로 문귀동 고소, 진상규명 요구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변태적 성고문을 강력히 규탄한다’ 성명서 발표
-07.05, 변호인단 9명,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 고발(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
-07.09, 신구교 단체대표 10여명(김동완, 이돈명, 이우정 등), ‘부천서성고문대책회의’ 및 ‘대책위’ 구성
-07.16, 검찰, ‘성모욕행위 무근거’ 공식발표
, 신민당, 검찰 수사발표에 신뢰성 의문 제기 및 독자진상규명 의사 천명
, 변호인단, 검찰 수사결과 불복 재조사 재정신청 표명
-07.18, ‘부천서성고문대책위’, ‘부천서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 개최
-07.19, 경찰,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명동성당 개최 예정) 원천봉쇄
, 명동입구 및 주변 도심에서 산발적 시위
-07.22, 부천서성고문대책위, ‘성고문공대위소식 1호’ 발간
-07.27, 개신교 주최 ‘성고문규탄 기도회’ 경찰 원천봉쇄로 성공회 정문 앞, 성공회 주변 및 새문안교회에서 산발적인 비상기도회로 대체
-07.28,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청소년대책전문위원 김형배, 양심선언 발표(19일 대회참석 후 21일 강제사직)
-08.06, 부천서성고문대책위, 사건관련 상임위 신민당의원 초청간담회
-08.11, 광주정평위, ‘성고문폭로 위한 특별미사’(광주 남동성당)
-08.14,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시민폭로대회’(신민당사)
-08.21, ‘여성단체연합 성고문 대책위’, ‘여성인권대회’(주제;“여성해방과 성고문”) 개최 (기독교회관 대강당)
-09.01, 199명의 권인숙 변호인단 결성
-11.21, 권인숙 1심재판, 3년구형
-1987.07.08, 권인숙 가석방
-1988.02.09, 대법원, 권인숙 변호인단 재정신청 인정
-1989. 문귀동 징역5년 실형선고 및 권인숙 위자료 지불 판결

<사건배경>
86년 5?3 인천 사태는 야당에서 재야?학생?노동 운동에 이르기까지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이 다양한 종류의 헌법개정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 대중적 기폭점이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정부는 정권안보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3 인천사태의 배후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구잡이식 구속, 수배, 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특히 부천경찰서는 5?3 인천사태의 관할인근서로서 수사업적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한 당시는 경찰이 일종의 수사관행으로 여성수감자에 대해 성고문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만연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성고문설에 대해 권인숙 공동변호인단의 일원이었던 이상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전부터 인천 5?3 시위사태를 수사하면서 여자 구속자에게 성적 고문이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 떠돌았고, 구속자들로부터 실제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나, 구속자들이 수치심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를 꺼리고 증거를 확보할 수가 없어 유야무야되고 만 경우가 있었다.” (이상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수치심을 떨쳐버린 권인숙의 용기와 희생>, 월간조선 엮음, 『한국현대사119대 사건: 체험기와 특종사진』, 조선일보사, 1993, 318~319쪽)
한편,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권인숙은 1985년 봄, 부천의 한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위장’취업하였다가, 86년 6월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권인숙에게 공문서(주민등록증)위조혐의 외에 5?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사건내용>
6월6일 새벽 4시경 상황실로 끌려온 권인숙을 보고 부천서장은 “권양이 수사에 너무 협조를 안하는군” 하며 화를 내고 나갔다.(오대영, <부천서 성고문 규탄대회사건>, 한승헌선생 회갑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분단시대의 피고들-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범우사, 1994, 423쪽) 그후 상황실장은 문귀동 형사에게 수사를 지시했다.
문귀동은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리고 가 새벽 4시30분경에서 6시 30분경까지 두시간에 걸쳐 1차 성고문을 자행했다. 먼저, 문귀동은 5?3 사태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협박과 공갈을 반복했다. “서울 대학? 나도 대학 다녀봤어. 그리고 너 같은 년들 하나둘 다뤄본 거 아니야. 5?3 사태 때 애들도 내 앞에서 빌면서 다 불었어. 우리 너 같은 년을 죽이지만 않으면 돼.”(권인숙, 『하나의 벽을 넘어서-부천서 성 고문 사건 주인공의 자필수기』, 거름, 1989, 19쪽)
그는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수사방향을 바꾸어 부천에서 만났던 사람을 대라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성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자기 앞에 와서 서라고 했다. 웃저고리를 벗으라고 했다. 남방도 벗으라고 했다. 하라는 대로 하고 흰색 반팔 면 티셔츠만을 입은 채로 다시 섰다.그가 서슴없이 나의 티셔츠와 러닝셔츠와 브래지어를 들추었다….. (중략)....그는 내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안되겠군. 이년아, 간첩도 자궁에다 봉만 박으면 불어. 5?3 애들도 발가벗고 저 위에 올라가니 다 불더라.”(같은책, 19~20쪽)
이후, 수배자들과 현장취업라인에 대한 끈질긴 심문에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문귀동은 6월7일 밤 9시30분경, 말그대로 노골적인 강간행위라고 할 수 있는 2차 성고문을 가했다. “그는 비양거리면서 나의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고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팬티 속으로 자기 손을 쑥 집어넣었다. ...(중략)...문 형사가 나를 의자에서 일으킨 후 바지를 벗겨 무릎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책상 위에 엎드리게 했다. 문 자신도 바지 지퍼를 내리고 나의 뒤쪽에서 자신의 성기를 나의 국부에 대었다 떼었다를 몇 차례 했다.”(같은책, 39~40)
악몽의 시간을 이겨낸 권인숙은 이후 교도소 면회과정을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신민당 그리고 여성단체들은 7월19일 성고문?용공조작 폭로?규탄대회를 개최하는 등 각각 이 사건을 정권의 추악한 도덕성을 폭로하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로 삼게 되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한마디로 지배정당성이 취약한 가부장적 국가권력이 권력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저지른 반여성적인 성폭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건 발생 이후 검찰과 경찰의 밀접한 공조체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건의 진실이 폭로된 연후인 7월17일, 검찰은 공식발표를 통해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며 근거없는 역공을 펴는 등 사건의 은폐까지 기도하였다.
이 사건은 2심과 3심을 거쳐 87년 4월 종결되었는데 권인숙은 공문서위조 혐의로 1년 6개월의 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가 87년 7월 가석방되었다. 변호인단의 재정신청 촉구 노력에 힘입어 결국 89년 문귀동에게는 5년의 실형이 권인숙에겐 위자료 지급 판결이 내려지게 되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국가권력의 폭력적 가부장성과 반여성성을 여실히 드러내준 한편, 여성관련 문제를 부차화시켜버리거나 내부의 성폭력 피해여성들의 인권보장을 등한시 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 내부의 가부장성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권인숙의 용기와 저항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회고하건대, 저 잔약한 체구의 처녀가 지난 6월6일과 7일 부천서에서 저 무도한 야수적 능욕을 당하고, 산산이 파괴된 인생의 절망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통한 자기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출구를 알 수 없는 치떨리는 분노에 시달리면서 경찰서 보호실에서 유치장으로, 다시 교도소의 감방으로 짐짝처럼 넘겨질 때, 그 순간순간마다 그녀의 뇌리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오직 자기파괴와 죽음에의 충동, 그리고 한시도 떠나지 않은 악몽 속의 가위눌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권양은 이 죽음과 같은 절망을 뚫고 부활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며 실로 위대한 결단과 용기로 진실을 위하여 일어섰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권양이 겪은 저 전인미답의 지옥과 같은 고통과 번민, 좌절과 망설임, 그 악몽의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실로 눈물없이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조영래,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1, 123쪽)


사건사전번호 : H-1092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