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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관련자 대량구속 사건

제목(Title) :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관련자 대량구속 사건 : 건대항쟁


사건발생일 : 19861028


사건종료일 : 19861031


사건내용 : <사건경과>
-86. 10.28, 애학투련 결성식(건국대 민주광장)
-10.31, 경찰, 대규모 진압작전 개시(일명 ‘황소 31 입체작전’)
-11.04, 검찰, ‘공산혁명분자 건국대점거난동사건’ 발표
-11.05, 김대중, 대통령 불출마 선언

<사건배경>
애학투련의 결성과 그에 대한 정부의 집중적이고 대규모적인 탄압은 두 가지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첫째, 구학련 및 자민투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의 NL파는 86년 초반기부터 반미투쟁을 최우선으로 하는 NLPDR론의 정립과 대중적 유포 및 그에 입각한 실천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속에서 애학투련은 기존의 전국적 학생운동조직인 전학련과 전민학련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반미투쟁의 새로운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던 NL 진영의 조직적 표현이었다. 이는 결성식 당일인 10월28일자 명의의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명의의 ‘전국반외세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 선언문’에서 잘 드러난다. 이 선언문에서 애학투련은 한국의 현대 40년을 미제와 그 앞잡이 대 민족간의 대결구도로 압축시키고 이에 따른 8대 투쟁목표를 천명한다.
“하나,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분쇄하고 그 앞잡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족자주와 민중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을 분쇄하고 민족의 자립화를 이룩한다.
셋, 전두환 일당의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넷,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철폐하고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한다.
다섯, 우리 학생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며 진보적인 교육제도를 쟁취한다.
여섯, 우리 4천만 민중의 민주적 권리 쟁취 투쟁에 적극 동참한다.
일곱, 모든 민족 민주 세력과 광범히 연대하여 함께 투쟁한다.
여덟, 세계의 평화를 옹호하여 제국주의의 모든 호전적 침략을 분쇄한다.”
애학투련의 8대 투쟁목표는, 반미자주화투쟁하의 반파쇼민주화투쟁 및 조국통일촉진투쟁 등 3대 투쟁을 적절히 배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이 선언문은 기존의 학생운동 내부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체로서의 애학투련을 설정하는 방향하에 기술되었다.
“우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은 과거 우리 투쟁조직의 오류를 극복할 것을 선언합니다. 지난 85년의 전학련, 삼민투는 백만학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따라 줄 것을 강요하여 고립되어 버렸으며, 진정 우리 백만학도 모두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대표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86년 상반기의 전민학련 또한 우리 애국학도들의 이념성과 대적성을 부각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일조했을지 모르나 소수 몇몇 대학만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투쟁에만 매달려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적들의 탄압에 그만 붕괴되어 버렸습니다.”(이상, 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8, 375~377쪽.)
둘째, 애학투련 결성식에 대한 정부의 대량적 탄압은 특히 이들의 반미적 친북적인 구호와 주장에 묻어나오는 반미?친북지향성의 문제를 빌미로 삼는데, 이는 당시 정부에 의한 조작설 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에서 야당과 재야의 개헌투쟁공세로 인해 정부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적절한 탄압카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작의 가능성도 충분한데, 애학투련의 본래적인 친북적?반미적 성향과 투쟁체로서의 자기위상 설정은 그 가능성을 무화시키기도 한다.

<사건내용>
86년 건대 결성식에 맞추어 제작, 배포된 애학투련 명의의 확인된 유인물은 총 6종인데, 위의 ‘선언문’을 제외하면, 각각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촉진을 위한 투쟁선언문’, ‘미일 경제침략 저지를 위한 백만학도 투쟁선언문’, ‘반공이데올로기 분쇄 투쟁선언문’, ‘전두환 일당 장기집권 음모 분쇄와 민주 제권리 쟁취 투쟁선언문’, ‘신민당에 보내는 공동투쟁 시안’ 등이 그것들이다.
한편, 경찰이 애학투련에 주목을 하게 된 계기는, 결성식 이전, 서울대와 상지대에서 발견된 북한의 ‘민주조선’ 보도내용과 유사한 대자보와 유인물이었다. 여기에다, 결성식 당일인 28일 오전 9시40분경, 건국대 학생회관 게시판과 중앙게시판에 나붙은 애학투련 명의의 대자보가 문제시되었다. “6?25는 남녘땅에 친미예속적인 괴뢰정권을 세우고 분단을 영구화시키려는 미제에 반대하는 범민족적인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더불어 “반공이데올로기는 반민중적-반민족적-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깨부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에 따라 대자보는 건대 학교측에 의해 곧 철거되었고 경찰은 연합시위 주동자를 대자보의 제작자로 지목하고 수사중이라고 하였다.(조선일보, 1986년 10월29일자)
언론이 전하고 있는 10월 28일 결성식 당일의 긴장되고 다급한 분위기를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7시 40분, 결성식 참여 대학생들 건대로 집결하기 시작.
-오전 10시, 교내 곳곳에서 학교별 토론회 개최
-오후 1시, 전체 집회대오(전국 26개대생 1,500여명) 본관 앞 집결 후 연합선언문 채택
-오후 3시 20분~6시, 레이건?나카소네 화형식 중 정?사복 경찰 1천5백여명 교내 투입
, 집회대오, 경찰과의 공방전 후 본관 정경대 사회대 도서관 등 7개 건물 점거농성 및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화염병 투척 (경찰, 이 과정에서 학생 45명 연행, 5시20분경, 취재중인 한국일보 柳東熙, 劉永煥 기자 및 MBC 崔一九 기자 폭행)
-오후 6시, 점거대오, 본관 및 사회대를 중심으로 점거재편
-오후 9시 10분, 건대 긴급 학-처장회의 개최, 29일 임시휴강 결정(같은 자료)

농성 이틀째인 29일 오후 2시경부터, 경찰과의 긴장된 대치국면에서 점거농성 학생대표인 鄭鉉坤(22, 서울대 지학교육과 4년 제적)은 자신을 애학투련 산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분과위원회 위원장이라고 소개하고 기자회견을 하여 투쟁의 의의와 결사투쟁의 각오를 밝히기도 하였다. 한편 경찰은 정사복 전경 3천3백여명을 동원하여 농성중인 건물 주변을 완전 포위하고 학생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시키기 위해 건물내의 일반전화를 모두 차단시켰다. 그리고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편성하고 애학투련 명의의 유인물과 벽보를 문제 삼아 학생들에 대해 “좌경성향을 넘어 친공성향을 띠고 있다”고 규정하고 북한주장과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농성학생 전원에 대한 연행방침을 밝혔다.(위 자료, 1986년 10월30일자) 검찰이 주되게 문제 삼은 문구들은, “반공이데올로기 까부수자”, “국가보안법 철폐”, “6?25는 민족해방투쟁”, “진달래꽃 머리에 꽂고…” 등이었는데, 특히 마지막 문구의 경우,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시킨다면서 국민들의 반북, 레드컴플렉스를 의도적으로 자극시키기도 했다.
농성 3일째인 10월 31일, 오전 10시 20분에 개시되어 12시경까지 진행된 경찰의 물리적, 폭력적 진압으로 농성은 강제해산되었다. 경찰은 이날 오전 8시 50분 병력 8천여명과 헬기 2대 소방차 28대 구급차 10대 등을 투입, 본관에서 4백66명, 사회관에서 477명, 도서관에서 1백48명, 이과대에서 67명, 학생회관에서 31명등 총 1,219명이라는 단일사건 사상초유의 구속자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진압과정에서는 경찰관 36명, 학생 42명 등 총 78명의 부상자가 생겼다고 한다.(같은 자료, 11월1일자)
11월1일 서울시경의 발표에 따르면, 결성식 당일 구속자 및 일반인을 포함하여 총 연행자수는 1천5백 25명으로 최종집계되었다. 대학별 연행자수는 다음과 같다.
서울대 183명, 연세대 136명, 건국대 300명, 한신대 1백3명, 서강대 85명, 이화여대 86명, 서울시립대 73명, 경희대 59명, 한양대 52명, 외국어대 36명, 덕성여대 25명, 국민대 26명, 성신여대 23명, 숙명여대 22명, 강남사회복지학교 22명, 장신대 20명, 한성대 20명, 성심여대 20명, 감신대 16명, 상명여대 15명, 경기대 13명, 서울여대 5명, 인천대 5명, 명지대 2명, 세종대 1명, 동국대 1명, 기타 전문대 4명, 재수생 1명, 일반인 3명 등이다. 연행자 철야심문 결과 경찰의 수사를 종합해보면, 애학투련은 전학련의 재건과 극좌 용공성향의 이슈투쟁을 각각 조직적, 정치적 목적으로 삼고, 자민투를 통하여 연락선을 유지하며, 구학련 핵심 미검거그룹이 주동이 되어 민민투의 잔존세력 등을 규합하였다.(같은 자료, 11월 2일자)
11월 12일, 경찰은 연행자 중 검찰 송치 1천2백 61명을 제외하면 실제 국가보안법 적용대상자는 1백명선 이내가 될것이라고 전망했다.(같은 자료, 11월 13일자)

마지막으로, 애학투련의 노선에서 한국사회 지배구조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표출했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던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애학투련 노선의 구현은 별다른 전술적 성과 없이 정부의 집중탄압을 자아내는 빌미로 활용되었고, 그것이 이후 건대사태에 대한 NL파 스스로의 부정적 자기평가로 이어졌다. 그 결과 NL파는 학생회를 전면에 내세우며 선도투쟁을 지양하고 대중투쟁을 전면화시키기 위해 ‘직선제개헌 쟁취투쟁’ 전술로 급격히 우편향화하였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당시의 'NL 대 CA'라는 학생운동 내부의 노선 및 조직 갈등 구도를 고려했을 때, 과도한 전투성 내지는 선명성 경쟁이라는 요소가 애학투련의 고립된 점거농성 전술에 대한 설명변수로 설정될 수 있을 것 같다.


사건사전번호 : H-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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