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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CA)그룹 사건

제목(Title) : 제헌의회(CA)그룹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70203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86.11.20, 안기부 수사착수
-1987.02.03, 서울지검 공안1부 사건 발표

<사건배경>
1986년은 민주화를 향한 범국민적 열망이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하여 87년 6월항쟁을 예고하던 시기였다. 민주화운동 진영의 반군부독재투쟁은 점점 그 강도를 높여갔고 신민당의 개헌추진서명운동은 전국적으로 지지를 넓혀갔다. 이러한 광범위하고 강렬한 국민들의 민주화열망은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국민들로부터 특별히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분리시키려는 전술을 채택케 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은 86년 하반기에만 좌경?용공?친북의 혐의로 ‘구국학생연맹’사건(10.17),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원회’사건(10.18),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 기도 사건(10.24),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10.28), ‘반제동맹당’ 사건(11.12) 그리고 ‘제헌의회그룹’ 사건 등을 발표하면서 민주화운동 진영 전반에 걸쳐 전면적인 탄압을 가한다.
한편, 86년, 학생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은, 재야단체들과는 별도로 80년대 중반 C-N-P 논쟁 이후 치열한 내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NL진영과 대립하며 전략?전술 논쟁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세력이 바로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그룹이었다.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볼셰비키의 정치?조직노선을 추구한 제헌의회 그룹은 당시의 정세 속에서 변혁운동의 ‘과학화’라는 사상?이론적 목표와 ‘노동계급중심주의에 입각한 민중독자진영의 정치세력화’라는 정치?조직적 목표를 추진해오던 경향들의 정치적 원형체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헌의회 그룹 사건의 경우, 당사자들 스스로 위와 같은 정치적 자기지향성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조직의 이념성의 측면에서는 당시 수사당국의 의도적인 조작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안기부가 자행한 수사과정에서의 불법적이고 반인간적인 고문은 이 사건에서도 비껴갈 수 없었다.

<사건내용>
검찰은 최민을 제헌의회 그룹의 총책이라 지목했으며, 그의 공소장에 ‘별지3’과 ‘별지4’의 형태로 첨부하여 제출한 핵심 문건이 “혁명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이하 ‘기수’)와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고 있는가?”(‘진군’)이다. 이중 ‘진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제헌의회에 대한 전술적 결의’(이하 ‘결의’)는 제헌의회그룹의 정치적, 조직적 목표를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결의’의 3대 주장은, 첫째, 당면 민족민주혁명(NDR)의 핵심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그에 의해 지도되는 혁명적 민중을 설정(혁명의 주체)하고, 둘째, 현 반동계급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의 민주적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의 소집 및 그를 통한 민주주의민중공화국을 구현하는 헌법제정이 필요하며, 셋째, 이러한 제헌의회소집투쟁은 그 자체로 현 군사파쇼와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으로 민중무장봉기로 발전할 것이며 이를 위한 구체적 결의 사항은, ① 기만적 개헌을 분쇄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해야 하며 이의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게 선전, 선동해야함 ②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 투쟁을 지도할 수 있음 ③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의 임무는 강령의 확정, 대중조직의 강고화, 전위의 훈련과 양성, 프롤레타리아트대중 및 민중의 정치적?계급적 각성임 ④ 민주주의민중공화국을 향한 제헌의회소집의 보장을 위해서, 혁명적 민중은 무장봉기로써 현 반동정권을 타도하고 제국주의를 축출해야 함 등이다. (이상, 제헌의회그룹 사건관련자 가족 엮음, 『민중민주주의를 위하여: 제헌의회그룹 사건기록』,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988, 106쪽)
이상과 같은 제헌의회그룹의 정치노선은 적어도 87년 대통령선거 시기까지는 NL진영과 대립구도를 형성하며 CA 경향의 학생?노동운동의 기본적인 전술노선의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김태진, <‘민족해방론:제헌의회론’ 논쟁에서 ‘민족해방론:민중민주주의론’ 논쟁으로>, 조희연 외, 『80년대 사회운동논쟁』, 한길사, 1989, 51~60쪽)
이 제헌의회그룹 사건의 수사는 86년 11월 20일부터 안기부에 의해 시작된 이래 87년 1월말경 송치시 까지 지속되었으며 사건 관련자들은 한달에서 두달간에 걸쳐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두 팔과 두 다리를 묶어 두 다리 사이에 봉을 끼워서 매달아놓고 구타하는 고문행위)등을 당했다. 특히, 유강근은 ‘100㎏’ 이라는 별명의 수사관으로부터 ‘가자 북의 낙원으로’ 라는 구호를 복창할 것을 강요당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유강근에게 성불구자로 만들겠다며 몽둥이로 성기를 위아래 무차별 구타당했다고 한다. 그 외에 김철수는 ‘강타’라는 별명의 수사관에게 사회주의자라고 인정하라는 자술서를 강요당하고, 김성식 또한 동일인에게 북한 노동당 및 평양과의 관계, “간첩에게만 사용하는 특수 10단계 고문시설로 끌고가 죽여버리겠다”는 살해협박을 받았다. 안기부는 이러한 고문을 통해 특히 북과의 연계성을 강제로 끄집어내어 이들을 준간첩집단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성식은 86년 11월 29일에서 12월 5일까지 집중적으로 각종 고문을 당한후, 어머니가 경영하는 식당의 이름이 ‘평양고을’인 점을 빌미로 또 다른 모종의 조작을 위해 추가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주요 관련자 중 유일한 여성인 이선희에겐 박명숙이라는 여자 수사관까지 가담하여 무차별구타와 통닭구이를 당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220~222쪽)
그런데, 고문과정에 대한 관련자들의 사후 진술을 통해서 특이한 사항이 발견된다. 첫째, 안기부가 자체적으로 고문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 사후 조처들을 특별히 취했다는 점이다. 당시 안기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의식하며 고문후 상처를 없애기 위해 관련자들에게 수시로 온수샤워와 안티푸라민 마사지를 시켰으며, 집에 전화를 걸게 해서 고문당한 사실이 없다는 얘기를 하라고까지 강요했다고 한다. 둘째, 고문과정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 전에 발생한 김근태, 권인숙 고문사건의 폭로를 의식한 듯, 자기들끼리도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이한 변화는 분명 안기부가 불법적이고 반인간적인 고문관행에 대한 추후의 처벌을 수사과정상 고려사항의 하나로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검찰 송치 이후부터 재판과정까지 본 사건의 관련자 및 그 가족들은 각각 그 어느 사건보다도 적극적인 구속자법정투쟁 및 구속자가족투쟁을 전개했다.
구속자들은 법정에서 판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자신의 원칙과 필요성에 따라 진술하고 주장하거나 아예 출정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재판은 자연스레 연기되었고, 1심 만기일을 10여일 앞 둔 87년 1월 20일경 검사의 사실심리가 20%도 진행되지 못하여 당국의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같은 책, 224쪽) 제헌의회그룹사건 피의자들은 파쇼체제하의 법정투쟁의 전형을 만들어보겠다는 목적의식성을 갖고 조직적인 법정투쟁을 전개하며 정권과의 적대성을 부각시키는 정치적 사건을 만들려고 했다. 변호사 홍성우는 당시 자신의 곤혹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인권 변호사도 크게 보면 제도권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재판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피고인들이 재판에 임했기 때문에 대단한 고충을 겪었다. 아마 이런 이유로 이 사건은 여간해서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같은책, 223쪽)
한편, 사건 관련자들이 당한 고문과 격렬한 법정투쟁은 이들 가족들까지도 민주화운동에 동참시키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성식의 어머니는 많은 대중집회에서 명연설가로, 그의 부인은 민가협간사로 변신했으며 이후 다수의 가족들이 87년 대선에서 백기완선거운동본부에 결합하거나 88년 총선에서 민중의 당 선거운동에 헌신적으로 동참하기도 했다.(같은책, 224쪽)
마지막으로, 정치노선을 가지고 제헌의회그룹을 평가한다면,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노동대중과 괴리된 인텔리의 조급성, 변혁노선의 도식성과 그로 인한 비현실성으로 모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헌의회그룹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위해서는, 노동계급 스스로의 정치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의 억압적 정치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제헌의회그룹이 민중진영과 군부독재와의 적대성을 폭로하려 하고, 야당의 보수성을 견제하며, 사회변혁의 중심주체로 민중과 노동자를 설정한 점 등은 이들을 장기적인 민주화과정상의 의미있는 정치세력으로 평가함에 있어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연구팀 자료) 1986년 개헌국면에서 ‘직선제 개헌’이 아닌 ‘제헌의회 소집을 통한 민중민주헌법 제정’을 주장한 이른바 ‘제헌의회 그룹(CA: Constituent Assembly)’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처벌한 사건.
- 1987년 2월 3일 서울지검 공안1부는 1986년 5월경부터 최민, 김철수, 윤성구, 민병두 등 과거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 민주화추진위원회(깃발 그룹),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 관련자들이 주축이 되어 레닌의 혁명이론을 학습하고 이를 기초로 ‘강령초안’을 작성하는 등 ‘제헌의회 그룹’ 결성을 준비해오다 1986년 8월 9일 민족민주혁명(NDR)을 통한 민주주의민중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조직을 본격 출범시키고 당면한 시기의 투쟁목표를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설정하여 이를 위한 시위선동 및 정치신문 제작 등의 활동을 하는 등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였다고 발표하였고,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내용을 인정하여 ‘제헌의회 그룹’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함.


사건사전번호 : H-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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