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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군 고문치사 진상 폭로 사건

제목(Title) : 박종철군 고문치사 진상 폭로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70518


사건내용 : <사건경과>
87.01.04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87.02.07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2?7 대회)
87.03.03 ‘고 박종철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3?3대회)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 시위. 439명이 연행됨.

<사건내용>
1987년 1월 14일 당시, 경찰은 제헌의회 그룹 사건으로 81학번 박종운을 수배 중이었는데 그의 홍길동 같은 잠행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던 중이었다. 박종운은 일주일 전 박종철의 하숙집에 들른 적 있었는데, 이때 박종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목도리와 마지막 남은 비상금까지 털어 그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박종운을 향하던 화살은 박종철에게 꽂히고 말았다.
긴급 연행된 박종철이 끌려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형사들로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종철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박종운의 귀에 들어가면 또 허탕이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지휘하에 조한경, 강진규, 이정호, 황정웅, 반금곤 등은 종철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차례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었지만 박종철은 묵묵부답으로 버틸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종철의 사지가 뻣뻣해졌다.
처음에 경찰은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엎어졌다”며 후안무치로 일관했으나, 담당의사 오연상씨가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고문 흔적이 있다”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시급히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2.7, 3.3 투쟁으로 뛰쳐나왔지만 역부족이었고, 전두환 정권은 도리어 현행 대통령 간접선거(소위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라는 초강수로 버티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를 집전하던 김승훈 신부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경관은 모두 다섯 명이며,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하여 국민을 두 번 속였습니다.”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하여 짜여지고 또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김승훈 신부의 5?18 폭로 이후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들끓는 여론은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6?10 대회 성사를 위한 학생회장들의 단식농성이 줄을 이었다. (오마이뉴스 ?2004년 1월, '박종철'은 명동에 있었다?, 2004년 01월 15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축소조작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훗날 언론에 다음과 같이 보도된 바 있다. “축소조작사실을 김 신부에게 제보한 사람은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야 운동가 이부영 씨(현재 민주당 최고위원)였다. 이부영 씨는 교도관들과 조한경 등을 통하여 진상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쪽지에 기록하여 교도관을 통하여 고영구 변호사댁에 숨어 살던 김정남 씨(전 청와대 교문수석)에게 보냈고 김정남 씨는 고 변호사와 의논하여 고 변호사가 통일민주당 관계자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그러나 증거가 명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민주당 관계자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 변호사는 다시 명동성당 함세웅 신부를 찾아가 이 쪽지를 전했고 정의구현사제단은 그 쪽지를 토대로 확인 작업을 벌인 끝에 5월 18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성명서는 김정남 씨가 쓴 것을 사제단이 조금 고친 것이었다.” (안상수,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 동아일보사, 1995, p.193)


사건사전번호 : H-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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