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대회

제목(Title)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대회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70819


사건내용 :
<사건배경>
87. 6월항쟁은 전국적이고 지속적인 대규모 궐기항쟁으로 승리적 결과물을 획득함으로써 한국 변혁운동사에 길이 빛날 한 획을 그었다. 특히 청년학생들에게 있어서 6월 항쟁은, 첫째, 청년학생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대중적 자각을 이루어낸 점, 둘째, 서대협 등 각 지역의 학교간 연대조직이 건설되고 이러한 조직들이 대중투쟁 과정에서 강화된 점, 셋째, 각 학교 학생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고 학생회에 대한 대중적 신망이 높아진 점 등의 귀중한 조직적 성과물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이러한 성과에 비해 6월항쟁이 가지는 한계점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전국적 규모의 집회와 시위를 지도할 수 있는 조직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청년학생의 전국적 조직, 전대협의 건설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적 조직이 존재하였으나 투쟁과정에서 실제로 해낼 수 있었던 일은 투쟁의 선언과 요구사항의 통일 그리고 이런 내용을 각 지역에 통보하는 정도로 제한되었을 뿐이어서 각 지역에서는 독자적으로 지역투쟁을 준비하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6월항쟁은 이러한 ‘고립분산적인 지역투쟁들의 결합’이었다.
국민운동본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학생도 상황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서대협(5.8 결성), 호남지역 학생연맹 건설준비위원회(5.15 결성), 전북지역 학생협의회(6.25 결성), 부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6.1 결성) 등의 지역연대조직이 있었으나 학생연대조직 건설을 모색하는 수준이거나 6월투쟁 과정에서 연대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급히 건설하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생연대조직의 튼튼한 밑받침이 될 수 있는 상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지역적 토대를 갖춘 전국적 대중조직의 건설뿐이었다. 그러나 청년학생의 전국조직이 필요하다고 해서 전대협이 갑자기 건설되는 것은 아니었다. 6월항쟁 과정을 통하여 청년학생들 사이에서는 전국적 청년학생조직이 건설될 수 있는 토양이 성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범한 학우들이 투쟁으로 진출함으로써 연대공동투쟁과 통일적 지도를 위한 전국적 대중조직 결성에 대한 대중적 동의와 결의가 형성되었다. 둘째, 6월항쟁을 전후하여 전국 각 지역별로 형성된 지역연대조직은 6월항쟁을 거치면서 단결의 형식적 구심일 뿐만 아니라 투쟁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협의조직 스스로도 대중투쟁을 책임져야 한다는 자각이 형성되었다. 셋째, 6월항쟁의 과정에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대중지도자가 탄생하여 대중운동 지도자의 전형이 창출되었다. 넷째, 1986년 하반기 이후 학생운동 내부에 일정 정도 정치사상적 입장의 근접과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통일단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위와 같은 판단과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전국적 청년학생조직 건설을 위한 구체적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돌베개 , 1991, 29~31쪽)

<사건내용>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강원대 충북대 충남대 등 전국 95개 대학생 4천여명은 19일 낮 12시 30분쯤 충남대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결성대회를 갖고 『현재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노동운동은 정당한 것』이라고 전제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요구를 표출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이날 채택한 선언문에서 군부독재정권의 퇴진, 통일민주당은 현재 진행 중인 정치협상에서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할 것,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 미국은 내정간섭을 중단할 것 등을 주장했다. 학생들은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영남 호남 등 전국 6개지역 19개지구별 대표들의 간접투표를 통해 전대협 의장에 서대협 의장인 이인영(李仁榮)군 (22·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뽑았다.
학생들은 이 날 결성대회를 마치고 소속대학 및 지역의 깃발을 들고 교내를 돌며 시위를 벌였으며 2백여명은 대전역 광장을 점거하고 「독재타도」등의 구호를 외치며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투석전으로 맞서기도 하였다. 경찰은 이날 시위에서 서울대, 충북대 등 9개대생 13명과 일반인 1명을 연행했다.(조선일보 1987.8.20)
87.7.5 이한열 열사 장례식 절차와 관련, 서대협의 연락으로 연세대에서 열렸던 전국 각 지역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서 전국적 학생대중조직 건설에 관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다. 8.1 고려대에서 제1차 전국 대학생 지역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고 준비하여, 그 후 세 차례의 연석회의를 거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건설을 결의하였다. 연석회의에서는 8·15를 기점으로 하여 전대협을 수립할 것을 합의하였고, 수해복구 활동, 구속 양심수 석방투쟁, 노동자 투쟁 지원 등에 동참할 것과 백만 학도 통일대장정 일정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각 학교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을 백만 학우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농촌활동, 수해복구활동과 더불어 8·15 민족해방절에 맞춰 통일을 염원하는 청년학생들의 전국적인 행진이 진행되고 그 열기가 전대협의 건설로 모여 나갔다. 서대협이 통일염원제를 서울대에서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8.13~17 사이에 서울지역은 단국대 천안교정에서 대전으로, 호남지역은 전북대에서 대전으로, 영남지역은 구미에서 대전으로, 강원·충북지역은 청주에서 대전으로 행진하는 것을 기본계획으로 하는 통일대장정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집중호우를 헤치고 조국강토 곳곳에 애국의 함성을 울려 퍼뜨리며 충남대로 집결한 3천5백여 명의 학우들은 1987.8.19 역사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 날은 4천만 민중과 7천만 겨레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 앞에 자랑스런 조직 전대협의 건설을 선포하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발족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전대협의 1기 의장으로는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취임하였다. 전대협 발족식 당일 현재 전대협에 가입한 대학은 95개였다. 이 자리에서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백만 학우의 지향과 의지를 밝혔다. 1. 외세의 배격과 독재의 종식을 통하여 진정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한다. 3.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과 강력히 연대한다. 4.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쟁취하여 신성한 학원의 진정한 자유와 자율을 되찾는다. 5. 전면적인 백만 학도의 단결과 통일의 결정체로서 전국학생총연합 건설의 토대를 마련한다.
전대협의 건설은 해방이후 청년학생운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전대협 건설의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 전대협은 청년학생의 지난한 애국투쟁의 전통을 고스란히 우리시대에 계승한 결과물이다. 일제하의 민족해방운동에서, 해방후 민족자주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4· 19 혁명과 6·3 굴욕적 한일회담반대 투쟁에서, 매판군부통치에 반대하여 투쟁한 1960,70년대 민주화투쟁에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1987. 6월 민주대항쟁에서 청년학생은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한 애국심으로 불의에 항거해 온 투쟁전통을 가지고 있다. 전대협의 건설은 이러한 선배 청년학생의 애국투쟁전통을 이어받는 우리 시대 청년학생의 애국심의 표출이며 그 결과물이었다. 선배 청년학생의 불타는 애국심이 있었기에 전대협이 건설되었고, 전대협은 이 전통의 결집체이자 조직적 형식인 것이다. 둘째, 전대협은 학우들이 조직의 주인이라는 자주적 조직관점에 기초하여 건설된 최초의 명실상부한 전국적 학생조직이다. 전대협은 지난 시기 선배 애국학생들이 결성한 ‘서울 중심의 선포식 전국조직’과는 달리 백만 학우의 자주적 진출과 각 대학 학생회의 민주적 발전에 근거하여 수립된 전국조직이다. 1984년의 ‘전국대학생대표기구회의’, 1985년의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1986년의 ‘전국민족민주학생연합’(전민학련),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 등 전대협 이전의 전국학생연대조직들은 그 이름과는 달리 대중적 토대가 취약하고 상층 중심적이며 서울지역 중심적인 선포식 연대조직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대협은 선포식이 아니라 대중투쟁 과정에서 건설된 대중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기의 전국학생조직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전대협이 학우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에 의해 결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대협을 이전 시기 전국학생조직과 근본적으로 구별될 수 있게 하는 것은 6월항쟁에서 분출된 백만 학우의 자주적· 전면적 진출에 기초하여 백만 학우 모두가 조직의 주인이라는 자주적 관점에서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6월항쟁을 거치면서 백만 학우의 자주적 진출을 수렴하고 통일·집중시켜 지속적인 활동을 수행할 조직적 형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확인된 조직 건설의 필요성과 투쟁의 성과에 기초해서 전대협은 건설된 것이다. 또한 전대협은 아래로부터의 학생회 건설과 강화 그리고 낮은 차원으로부터의 지역연대조직 건설에 기초하여 건설됨으로써 튼튼한 조직적 토대를 가꾸어나가면서 건설되었다. 1985년부터 시작된 학생회부활·강화투쟁, 연대공동투쟁의 활성화에 기초한 지역연대조직의 건설 그리고 마침내 전대협의 건설이라는 상향식 조직건설 방침에 따라 결성되었기 때문에, 전대협은 정권의 탄압에도 쉽게 와해되거나 자체로 분열하지 않는 공고한 조직적 기초를 갖게 된 것이다. 셋째, 전대협은 백만 학우의 단결의 구심이고 유일한 대표조직이다. 분열은 죽음이고 단결만이 살 길이라는 변혁적 단결사상은 변혁운동의 역사에서 확증된 진리이며 6월항쟁이 가르친 피의 교훈이다. 전대협은 이러한 투쟁역사에서 확증된 진리이고 피의 교훈인 단결의 사상에 기초하여 건설되었다. 전대협은 광범위한 공동투쟁을 벌이고 연대조직을 건설·강화하여 연대공동투쟁과 연대조직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확립하고 이를 확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건설된 것이다. 전대협은 백만 학우의 다양한 정치적·경제적· 문화적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지역간 정서의 차이와 역량의 불균등을 극복하여 이를 하나의 목표와 행동 통일로 이끌고자 하는 단결사상의 조직적 성과물이었다. 백만 학우가 바라고 민중이 소망하는 대의 앞에서 대범하게 단결하며 사소한 차이를 과장하고 확대하여 단결을 그르치는 태도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주적 단결사상은 전대협의 건설에서부터 최고의 기치이며 정신이었다. 전대협의 건설로써 청년학생의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단결투쟁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또한 전대협은 학우들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구성되는 학생회가 모인 조직이기 때문에 백만 학우를 대표하는 조직이다. 전대협 이외의 다른 어떤 조직도 백만학우를 대표할 수 없다. 학생회가 각 학교의 전체학생을 대표하듯이 전대협은 백만학우를 대표한다. 전대협은 백만학우를 대표함으로써 청년학생의 역사적 임무이며 요구인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과 학원의 자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다. 넷째, 다른 부문운동보다도 먼저 전국적 대중조직을 건설함으로써 전대협은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등 각계각층의 전국조직 결성에 모범이 되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돌베개 1991), 30~36쪽)


사건사전번호 : H-1142



연관자료 : 이 자료에는 연관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