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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목사 방북사건

제목(Title) : 문익환목사 방북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90325


사건내용 :
<사건배경>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과 각계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남북교류 제의의 거부가 잇따르는 가운데 1989년 3월 25일 문익환·정경모·유원호 일행의 방북이 결행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작가 황석영도 평양에 도착하였다.
정부의 창구단일화론을 정면으로 깨면서 이루어진 이들의 방북행위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가져왔다. 정부는 “문익환 목사 등의 평양밀행이 김일성 집단의 일관된 대남분열정책의 소산”이며 반국가적 행동이기 때문에 구속수사방침을 처음부터 천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재야단체와 재야인사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북한과의 교류·접촉을 시도하였던 이영희·고은·이재오·이부영·조성우 등 대표적인 재야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반공감정을 이용하여 5공청산 등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눈꼴사나운’ 세력들의 제거와 야당의 개혁요구에 대한 견제, 그리고 ‘여소야대’정국 하에서 수세로 몰리고 있던 상황의 반전을 위한 기회로 이 사건을 이용하였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338쪽)

<사건내용>
국토통일원은 25일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이 ‘25일 저녁 문익환 목사가 그 일행과 함께 북경을 경유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고 밝혔다. 북한 중앙통신은 25일 남북정치협상회의 개최를 위해 초청했던 한국의 전민련 고문 문익환 목사의 일행이 이 날 평양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이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 각 정당, 각 계층의 대표에 의한 남북 정치협상회의를 제창하여 남조선의 정당총재와 문익환 목사 등을 포함한 남조선의 유명 인사를 평양에 초청했었다. 그 초청을 받아 평양에 방북한 사람은 문익환 목사가 처음이다.
문목사는 평양 공항에서 성명을 발표,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양 땅에 첫발걸음을 내딛는 이 순간 이남의 4천만 민중의 뜨거운 시선이 본인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이 통신은 전했다.(조선일보 1989.3.26)
1989.3.25 문익환 목사와 일행인 유원호, 정경모씨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 등을 만나 회담을 갖는 등 10일 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공안당국은 문목사 일행이 NWA기 편으로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 문목사 일행을 김포공항에서 구속, 수감했다. 문목사 일행의 돌연한 ‘3·25 방북사건’은 이후 공안정국의 회오리를 몰아온 부작용을 낳기도 했으나 민간 차원에서 통일의 물꼬를 터뜨린 쾌거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문목사의 방북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를 통해 초청한 것을 응낙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문목사는 북한 방문 중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 통일방안 등에 관해 회담을 갖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안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문익환 목사 개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남북의 관계자가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중대한 전진을 이룩하게 되었다. 전민련 등 재야단체들은 ‘문목사의 방북이야말로 통일을 앞당기는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각계 인사들로 문익환 선생 환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문목사에게 최고 사형까지 구형이 가능한 국가보안법상의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죄 등을 적용하여 구속기소했다. 공안당국은 문목사가 정부의 허가없이 불법으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북한을 방북했고, 북한의 허담과 함께 ‘연방제 방식의 통일방안’ ‘팀스피리트 훈련 반대’ 등에 합의, 반국가단체에 동조했으며, 김일성과 회합을 하는 등 반국가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 구성원과 회합, 통신했다고 밝혔다. 문목사의 방북은 ‘공안합동수사본부’(이하 공안합수부)의 발족을 가져왔다. 안기부, 검찰, 경찰, 보안사로 구성된 공안합수부는 좌경세력의 발본색원이란 명분을 내걸고 6·29선언 이후 활성화됐던 재야운동권에 대해 ‘각개격파 식’의 탄압을 가했다. 공안합수부는 문목사 밀입북 수사를 계기로 이부영, 이재오, 고은 등 재야 핵심인물들을 차례로 구속하는 등 공안정국을 주도했다. 문목사 방북사건은 5월 들어 ‘북한에 의한 정치공작’에 기초한 ‘간첩사건’으로 규정되고, 이어 문목사와 유원호씨가 기소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공안합수부는 5월 1일 평민당 총재 김대중씨를 소환, 문목사의 방북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고 민정당의 이종찬 사무총장, 평민당의 문동환 부총재, 민주당의 김상현 부총재와 김덕룡 의원 등을 소환했다. 합수부는 또 민주당 김영삼 총재에 대해서도 문목사와 함께 방북한 유원호씨로부터 사전에 방북사실을 통보받았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참고인 조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합수부는 이 날 “수사결과 문목사 일행의 방북을 주선한 재일교포 정경모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총련과 함께 유씨를 포섭, 문목사와 작가 황석영씨와 수차례 협의를 거쳐 방북을 추진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 과정에서 이들의 방북을 합법화하기 위해 두 야당 총재를 비롯, 거물 정치인들을 끌어들였다”고 밝혔다. 합수부는 이들 정치인들 대부분이 방북 사실을 전해 듣고 정부와의 사전협의를 권유했기 때문에 가벌성이 없다고 보고 형사처벌치 않기로 했으나 평민당의 문동환 부총재에 대해서는 친형인 문목사에게 여비조로 3백만원을 건네주는 등 적극적으로 방북추진을 협조한 사실이 드러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문목사 사건의 첫 공판은 6.25 서울 형사지법 합의30부(재판장 정상학 부장판사)에서 열렸다. 재판과정에서 검찰측은 문목사가 치밀한 모의를 거쳐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입북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고, 문목사는 자신이 북한의 지령에 의해 행동한 것이 아니라 통일의 디딤돌이 되기 위해 입북을 결행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8차에 걸친 문익환·유원호 피고인에 대한 공판은 9.18 결심공판에서까지 변호인단의 재판부 기피신청, 재판부의 궐석재판 진행, 법정소란 등으로 진통을 거듭했다. 문익환 목사 등 피고인들은 변호인단의 재판부의 대한 항의에 동조해 법정을 떠났고 결국 최후진술도 하지 못한 채 궐석으로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재판부는 선거공판에서 문 피고인 등 2명에게 각각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씩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밀입북한 뒤 북한의 연방제 통일안에 동조, 북한의 대남전략에 철저히 이용됐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혼란을 일으키고 법 질서를 유린한 점은 용납받을 수 없다. ······ 그러나 북간도와 신의주가 고향인 피고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민족사랑 정신 등이 밀입북 동기가 된 점을 고려, 이 같이 선고한다.”고 밝혔다.
문목사의 방북은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의 디딤돌이 됐다는 긍정론과 통일문제는 일원화된 창구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부정론 사이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문목사의 대한 사법처리를 둘러싸고는 정부의 허가를 받고 방북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관련, 법 집행의 형평 문제 등 시비가 일기도 했다. 재야 진영에서도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문목사의 방북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도 방북의 시기와 방법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통일운동사의 일대 전기라고 환영을 표하는 입장이었다. 전자의 경우 문목사의 방북이 조직적인 행동이 되지 못했다는 점, 민중의 생존권 투쟁과 광주, 5공 청산 투쟁이 고양되는 시점에서 투쟁의 집중점을 흐렸다는 점,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문목사의 방북을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비판을 하였다. 이에 비해 후자는 1989년 민주화 투쟁의 가장 커다란 과제를 ‘두 개의 한국’ 책동 분쇄와 조국통일운동의 활성화로 설정하였는바 팀스피리트 반대투쟁, 범민족대회 추진 등이 지리멸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차에 문목사의 방북이 이를 전변시켰다고 평가하며 이를 계기로 조국통일운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문목사 방북 사건은 민주화 진영에 혼란을 주고 노태우 정권에게 탄압의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나, 노태우 정권의 7·7 선언과 일련의 국방 대북정책의 허구성과 반민중성, 반민주성을 폭로하고 통일운동의 민중적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는 데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조국은 하나다>, ?? 한국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3', 녹두, 1993, 226~230쪽)


사건사전번호 : H-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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