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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부천지역노동자 총파업투쟁

제목(Title) : 89 부천지역노동자 총파업투쟁


Subject :


사건발생일 : 19890409


사건종료일 : 19890415


사건내용 :
<사건배경>
4월 15일 부천에서는 6.29선언 이후 최초의 지역 총파업이 부천투쟁본부의 깃발아래 수행되었다. 4월 9일 ‘임금인상 완전쟁취와 노동운동탄압 규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1,500여명의 노동자가 부천역에 집결하여 대회장소로 가두행진을 하던 중 경찰이 직격최루탄을 발사하여 머리가 깨지고 손가락이 절단되는 등 2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부천투본은 대회를 마치고 본부장 등 50여 명이 부천서에 항의 방문한 결과 연행자중 7명을 석방시키고, 나아가 부상자 치료를 요구하였다. 다음날인 4월 10일 다시 70여명이 항의 방문하던 중 경찰은 또다시 협상대표들에게 폭력을 사용, 강제해산시키던 중 공성통신 위원장의 광대뼈가 으스러지고, 풍원 위원장 이마가 깨지는 중상을 입혔다. 또한 4월 11일 교섭차 방문한 한경석 본부장과 임동섭 상황실장을 전격 구속하였고, 상황을 전해 듣고 간 조합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하여 6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부천지역 노동자들은 구속자들이 석방될 때까지 투쟁을 결의하고 4월 15일 마침내 총파업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4.15총파업은 지역지도부 침탈에 맞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부천지역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과시하고, 확실한 연대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으며, 정치적 성격을 갖는 구속자 석방투쟁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전노협 백서')

<사건내용>
경기도 부천지역 임금인상 및 노동법 개정투쟁본부 산하 40개 노조는 14일 오전 모임을 갖고 지난 9일 노조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과 관련 구속된 투쟁본부 한경석 본부장(28 신광전자 노조위원장)과 임동섭 상황실장(34 전 원방노조위원장) 등 2명의 즉각 석방과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비 보상 등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15일 오전 10시를 기해 일제히 동맹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부천지역 투쟁본부측은 지난 9일 오후 1시쯤 투쟁본부 산하 노조원 1천명이 성심여대에서 오후 2시부터 개최예정이던 임금투쟁 승리쟁취 및 노조탄압 분쇄 결의대회에 참석키 위해 부천역에서 춘의사거리 쪽으로 가던 중 이를 저지하던 경찰이 노조원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는 등 폭력을 행사해 김순덕씨(29 공성통신 노조위원장)가 광대뼈가 부러지는 등 4명이 중상, 20여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노조원들은 평화적인 집회에 참여하려는 노조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본격적인 임금교섭을 앞둔 민주노조 세력에 대한 명백한 탄압행위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989.4.15)
경기도 부천지역 임금인상 및 노동법개정투쟁본부 산하 50개 노조 중 노사분규로 이미 파업 중인 7개 노조를 제외한 43개 노조 5천여 노조원들은 15일 하룻동안 시한부 동맹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오후 2시 부천역 광장에서 갖기로 한 경찰폭력규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두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가 무산되자 시내 곳곳에서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위 신문 1989.4.16)
4월 9일, 부천지역 노동자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부천역에서 “임금인상 완전쟁취와 노동운동탄압 분쇄 전진대회”를 개최한 후 ‘성심여대’로 평화적인 행진을 시작했으나 이를 폭력경찰들이 직격 최루탄을 퍼부으며 해산시키자, 가두투쟁을 전개하며 성심여대로 재집결 후 교문을 사이에 두고 재격전후 해산하였음. 이러한 과정에서 20여 명이 중상을 입었고, 본부장 등 50여명이 항의 방문하여 연행자중 7명이 석방되었으나, 부상자 치료와 연행자 전원석방을 요구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4월 10일, 100여명이 대책을 요구하며 경찰서 대기실을 점거농성하자 백골단을 투입, 협상대표까지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함. 이 과정에서 공성통신 위원장(광대뼈함몰), 풍원 위원장(이마함몰)등을 포함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중상을 당함. 4월11일, 항의차 방문한 본부장(한경석), 상황실장(임동섭)을 전격 구속하였고, 상황을 듣고 달려온 조합원들을 다시 구타하여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6명 부상. 4월 12일 오전 11시 부천지역 전체위원장단 회의를 소집하여 ‘노동운동탄압과 구속노동자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대책논의에 들어갔으나, 결론을 맺지 못하였고, 다시 저녁 7시 확대간부회의로 안건을 이월, 50여개 노조 간부 200여명이 참가하여 구속동지 석방투쟁을 결의하였다. 한편 각 지구별 규탄대회가 자발적으로 개최됨. 4월 13일, 신광전자에서 500여 명의 조합원이 “구속자 석방촉구 대회”를 개최한 후 가두투쟁을 전개하여 내동파출소, 도당동파출소를 습격하며 대중적 분노를 폭발시킴. 4월 14일, 각 지구별로 “구속자 석방촉구 대회”를 개최한 후 2개의 홍보시위대가 춘의동 4거리에서 합류, 1,000여 명에 달한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을 전개하여 전투경찰의 무장해제 직전까지 몰아감으로써 자신감을 불어넣음. 4월 15일, 총파업을 결행한 49개 노동조합 총 4,000여 명이 결집하여, 지역내 백골단을 포함한 1,500여명의 경찰병력과 약 3시간에 걸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고, 시위 중 독점재벌의 상징인 현대자동차 영업소를 공격. 오후 5시 대아노조에 집결하여 4.15투쟁 보고대회를 통해 마무리. 4월 25일, 신광전자에서 2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동조합간부 확대평가회의’를 통해 4.15투쟁에 대한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토론을 가짐.
4.15 가두투쟁은 내동지구, 춘의지구(원미, 남부지구 포함), 도당지구 등 3개 지구로 나누어 집결하였고, 이렇게 집결한 각 지구대는 집결지로부터 부천역을 향해 풍물대, 전투조를 앞세워 진격했다. 각각은 가로막는 전경들을 소수 전투조로 막으면서 신속하게 이동하여 부천역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진격한 3개 지구대는 부천역에서 최종집결지인 ‘대아기계’로 귀환하여 49개 노조 총 5,500여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4.15총파업 정리집회를 열고, 투쟁을 마무리했다. 4.15총파업은 6.25이후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최초의 지역총파업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천 노동자들은 급격히 전투력이 고양되어 가두시위가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정권과 자본가 역시 노동자들의 기세를 강제로라도 꺾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폭력경찰은 4월 18일 새벽 4시 부천역에서 내동까지 3,000여명의 병력을 투입, 당시 파업 중이던 대흥로크와 우일 노동조합 등에 기습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여 파업투쟁을 해산하고 주요 간부 등 178명을 전격 연행, 3명의 위원장을 포함한 4명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공권력이 투입된 노조들의 투쟁을 끝까지 연대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4.19일에는 당시 외국자본 철수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한국피코’에서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외국자본 철수저지 및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동력을 모아 5월1일에는 약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대회”를 투본 주최로 개최하였고, 다시 3,000명의 노동자들이 3시간에 걸쳐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투쟁전선을 반전시켰다. 5월 12일에는 그때까지 파업 중이던 8개 노조가 ‘임금인상 및 민주노조 사수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18일에는 파업 중인 ‘반도스포츠’에서 원천봉쇄를 뚫고 700여명의 노동자가 “구속자 석방 및 임투 완전승리 쟁취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5월 31일에는 부천지역 노동조합 확대간부회의가 개최되었고, 6월 2일에는 삼정동성당에서 ‘구속자 석방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가 열려 대중적인 분위기를 계속 고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6월 11일, 삼령정밀과 연경전자에 공권력이 투입되자 위원장단 전원이 13일부터 ‘반도스포츠’에서 4일간의 단식투쟁을 하였고, 6월 16일에는 “구속동지 석방 및 노조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쉼 없는 투쟁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부천지역의 노동자들은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 대한 애정과 공감대를 확산시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4.15총파업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강화되어온 민주노조 역량을 토대로 하면서도 개별사업장의 경제적 요구 및 투쟁을 한단계 뛰어넘어 지역차원에서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수행된 정치동맹파업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자의 정치적 동맹파업은 자본가와 그 수호자인 독재권력을 일거에 응징하는 내용을 갖는 가장 발전된 투쟁형태이다. 이는 풍산금속 노조에 대한 대탄압으로 시작된 노정권의 생존권투쟁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지역단위의 공동투쟁 조직으로 현실적 추동력을 가지면서 대중정치투쟁전선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에 결집된 주체역량은 공권력의 폭력을 무력화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현대중공업 진압작전 이후 더욱 노골화된 공권력에 맞서 주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대중정치 투쟁을 수행함으로 노운탄(노동운동탄압: 연구팀) 분쇄투쟁의 전선을 다시 회복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한편 4월 11일 투쟁지도부의 일부가 구속된 데 대해 대중은 투쟁의지가 솟구치고 있었으나 지도부는 이를 소극적으로 담아내는 데 급급하여 수세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갔다. 이는 부천지역의 지도부가 지역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과 대중에 대한 헌신성과 투쟁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함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지역노동운동의 주축이 될 대공장 민주노조의 건설 및 역량강화가 과제로 드러나고 있다. 지역내 대공장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는 경원세기노조와 동양에레베이터 노조는 이번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동양에레베이터 경우는 별개로 하더라도, 경원세기의 경우 노총민주화의 입장을 고집하면서 부천투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4.15투쟁에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기해야 할 문제는 4월9~15일 총파업투쟁 이후 4.18공권력 투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전국적 연대투쟁으로 발전해가지 못하고 부천지역만의 투쟁으로 그쳤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기에서 전국 노동자 연대조직 건설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되었다. (??전노협 백서')


사건사전번호 : H-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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